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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차희 Feb 23. 2023

꿈 속의 노래

4:22am

무서움에 잠에서 깼다. 학창시절이었고, 다같이 노래를 배우고 부르는 시간이었다. 무얼 위한 노래였는지는 모르지만 운동권에서 부를 법한 노래들이었다. 노래를 완벽히 숙지하지 못한 채로 다음 시간까지 들어오기로 했다. 집에 가려는데 이것 저것 짐이 많다. 책상 속 서랍에 넣어 둔, 제 때 가져가지 못한 모자들이 한 무더기가 나온다. 나는 모자들을 주섬주섬 챙겨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모든 게 암전이 되면서 내가 배운 노래들을 모두 까먹는다. 친구들도 모두 사라지고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내가 원래 어떤 학생인지를 보여주는 모습이 나온다. 제대로 수행 평가에 참여하지 않고 꼼수를 피우는 내가 보인다. 사실 꼼수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대처한걸지도 모른다. 사물함에 보관해 둔 내 총이 사라졌고 누군가에게 내가 어떤 학생인지 들켰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무서웠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보다 노래를 까먹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나를 보호해 줄 노래가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새벽 4시였다. 


우주의 노래를 무대에서 들은 적 있다. 우주의 20대가 쓰여진 노래였고, 잠잠한 목소리로 그의 20대가 어떠했는지를 전해주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쓰라린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들으며 이 시대의 민중가요는 우리 곁에서 삶의 어지러움을 이야기하고있는 노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굳이 어려운 단어를 쓰지 않아도 노래만으로 전달되는 삶의 분투가 있다고. 그래서 다함께 마음으로 부르게 되는 노래가 있다고 말이다. “나는 우리 노래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고 생각해. 나만은 어둠을 따라 살지 말자는 다짐(<쇼코의 미소> 중 <먼 곳에서 온 노래>, 최은영).” 노래를 짓고 부른다는 건 내가 여기 있노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노래를 잊는다는 건 나를 까먹는 일이며 부르던 노랫말이 달라진다는 건 그만큼 내가 달라졌다는 걸 보여주는 것일테다. 노래 부르는 일을 멈출 때 나는 더이상 나를 증언하지 않겠다는 의미와도 같을 것이다. 노래가 암전과 함께 잊혀졌을 때, 모든 게 사라졌을 때 내가 느낀 두려움은 사실 외로움에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사라진 것들 중엔 아마 나 역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존재하되 현실에 잊혀져 더이상 부르지 않는 노래들처럼 말이다. 


엊그제 <다음 소희>를 봤다. 춤을 좋아했던 소희는 춤을 멈추고 저수지로 들어간다. 소희에게 춤은 이루기 위한 꿈이라기 보단 내가 여기 있다는 또다른 형태의 증언이었을 것이다. 태준 역시 춤을 멈추고 그의 몸은 물류를 옮기는 일에만 쓰여진다. 스스로 춤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다시 춤을 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될 때 우리의 목소리가 사라지듯, 춤을 추지 못하게 될 때 우리의 몸은 사라진다. 소희는 한겨울에 저수지에 들어가 생을 끝낸다. 목소리와 몸을 잃어버린 우리는 끝끝내 얼어버려 영원한 외로움 속에 갇힐지도 모른다. 


우주는 더이상 노래를 짓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냐고 묻는다. 우주는 매번 고개를 젓는다. 그대신 우주는 블로그에 글을 쓴다. 노래로의 증명에서 글로의 증명으로 이동한 것이다. 노래를 잃더라도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살아있음을 계속해서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3년 2월 22일 수요일


 속의 노래, 4:22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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