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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래 Oct 11. 2019

사랑의 도시에서 만난 사람

[사카르트벨로] 세 번째 이야기, 시그나기 Sighnaghi



시그나기 M 게스트하우스 


    찌뿌둥한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어제의 선택이 잘못되었던 걸까. 창문 옆의 침대는 따뜻하기는커녕 얼음장 같기만 했다. 경량 패딩에 바지 두 개를 겹쳐 입고 이불을 여러 겹 덮었는데도 밤새 냉기가 가시지 않아 잠을 설쳤다. 다른 숙소를 알아볼 의욕도 기운도 없어 시그나기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침을 먹으러 1층으로 내려가니 이스라엘 여행자 두 명과 폴란드 청년 한 명이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마치고 택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스라엘 청년 아디는 2주의 짧은(!) 휴가를 내어 이곳에 왔다고 했다. "우린 휴가가 매우 짧기 때문에 너 같은 여행자처럼 한 도시에서 오래 머물 수가 없어." 는 별다른 계획 없이 여유롭게 여행하고 있는 내가 매우 부럽다 하며, 자신의 여행이 끝나감을 아쉬워했다. '초단기간' 여행밖에는 선택지가 없는 우리네 직장인들은 퇴사를 해야만 장기 여행을 나올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자신의 처지를 다시 생각하게 될까. 슬퍼하는 아디를 위로하고, 그의 남은 여행을 아낌없이 응원하며 배웅했다.



설산이 보이는 라고데키 버스 정류장


    라고데키를 떠나 두 번째 도시 '시그나기'로 향하는 길. 츠노리라는 아랫마을을 경유하여 마슈롯카를 갈아타고 시그나기로 올라올라 갔다. '요새'라는 뜻의 도시답게 시그나기는 무척이나 높은 곳에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위태롭게 달려 도착한 시그나기는 '관광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시그나기가 인기 여행지임을 증명하듯, 집을 떠나온 지 두 달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목격했다. 참고로 이란에서는 한국인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고,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겨우 한 명을 만났을 뿐이었다.


조지아 시그나기, 365일 한 편의 그림처럼 걸려있는 대코카서스 산맥


    어느 도시에 도착하든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숙소를 잡는 일. 예전에는 미리 조사해간 숙소 위치를 적어놓은 종이를 들고 다니며 게스트하우스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는데, 요즘엔 어플로 지도를 보며 웹사이트를 통해 미리 예약한 숙소를 쉽게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쉬이 찾을 수 있다 생각했다. 지도에 표시된 곳에 숙소가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금방 숙소를 찾아낼 것이라 여겼다. 시그나기는 온통 언덕이어서 숙소가 있(을 거라고 표시되어 있)는 블록은 굉장한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생긴 길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건물 외벽을 두리번거리며 한 바퀴를 돌아보아도 숙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원점으로 돌아와 길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화단에 걸터앉아 땀을 식혔다. 대낮의 열기에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려 불쾌했다. 

    5분쯤 지났을까. 게스트하우스 미스터리는 색다른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낯선 승합차 하나가 내 앞에 멈춰 서고, 중년의 남자가 창문을 내리더니 "M 게스트하우스?"라고 대뜸 묻는 것이었다. 내가 그곳을 찾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갸우뚱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니 차에 타란다.

    의심할 새도 없었던 것 같다. 날이 덥고 짐은 무거웠고 아저씨의 눈빛에서 진정성을 느꼈으며 동네가 주는 분위기는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M 게스트하우스는 지도에 표시된 곳과 가까이에 있었다. 제법 높은 곳에 있어 전망도 그냥저냥 볼만했고 가정집 같은 분위기가 따스해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 M이라고 하는 (게스트하우스 이름과 동명의) 주인아주머니가 있었다.

    M 게스트하우스와 'M 아주머니'의 공기는 사뭇 달랐다. 그가 보여준 싱글룸은 말끔했지만 볕이 조금도 들지 않아 대낮에도 차가웠다. 난방이 되냐고 물으니 "가스, 5라리", 부엌을 쓸 수 있냐고 물었더니 역시나 "가스, 5라리"...... 

    아주머니의 요구가 보편적이지 않은 데다가, 굳은 표정으로 화를 내며 얘기하는 차가운 태도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방을 보여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이만 나오려는데, G 아저씨가 나를 붙잡으며 다른 곳에 숙소가 하나 더 있으니 그곳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노 콜드. 가스, 5라리."  라 두 번 외치는 동안아저씨의 빠른 손은 내 짐을 차에 싣고 있었다.


    이번엔 시그나기의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숙소 앞에 내리니 북쪽으로 펼쳐져있는 대코카서스 산맥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 마이 갓.' 심지어 아저씨가 보여준 방은 그 숙소에서 가장 저렴하면서도 '마운틴뷰'를 독차지하고 있는 방이었다.

    괘씸함(?)에 하룻밤만 묵을 요량이었는데, 해가 지면서 보이는 풍경에 도저히 그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자마자 대코카서스 산맥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해 질 녘이면 노을을 감상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테라스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지아 시그나기, 노을 진 대코카서스 산맥의 풍경


    그날 밤, 아무래도 시그나기에 하루 이틀 묵어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도시의 느낌도 나쁘지 않았거니와 깔끔하고 전망이 완벽한 숙소를 얻었으니 이제 시그나기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것만이 남았다.




보드베 수도원


    여행과 로맨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큰 사촌 오빠는 출장으로 방문한 남미에서 만난 분과 결혼을 했고, 둘째 외사촌 오빠는 유럽 배낭여행에서 만난 분과 부부가 되었다. 까미노를 걷다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는 이야기, 인도 라다크에서 소울 메이트를 찾았다는 이야기......

    친구들은 나에게도 '운명의 남자'를 잡아(!)올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여행의 목적이 Mr. right을 찾는 게 될 수는 없지만, 내가 선택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음악이나 영화 취향이 비슷한 경우가 많았고 대화도 그럭저럭 잘 통했기 때문에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여행지에서는 '현지 사람 - 외국인 여행자 - 한국인 여행자' 순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의 우선순위가 확고했기에 큰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조지아 시그나기, 다게스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벽


   그렇지만 시그나기에서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시그나기는 '사랑의 도시'라는 별칭답게 로맨틱한 곳이었다. 마을 자체가 요새이다 보니 마치 사랑의 도피성에 온듯한 착각에 빠질 법했고, 1년 365일-24시간 결혼 증명서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져 있었다. 같은 숙소에서 시그나기로 신혼여행을 온 조지아 부부를 만났을 정도로, 현지인들에게 '사랑의 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백만 송이 장미'라는 유행가 가사의 주인공인 사랑꾼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생가도 근처에 있다고 하니, 시그나기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마치 한 몸과도 같이 느껴졌다.


    시그나기에 머무는 동안,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배낭 여행자들이 많지 않은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을 지나왔다. 누구라도 좋으니, 마음 열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만나길 바라며 보드베 수도원으로 향했다.



    보드베 수도원은 시그나기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중심 광장을 지나 이차선 차도로 접어드니 산길을 따라 나있는 도로가 과히 한적했다. 드문드문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지나다닐 뿐, 길 위에 드러누운 소 떼만이 나를 반겼다. 조심조심 걷고 있는데 오른쪽, 왼쪽, 정면에서 커다란 몸집의 소들이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 느꼈다. 인도에서 거대한 소에게 공격을 당할 뻔한 적이 있어 발걸음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대형 버스가 지나가며 소떼를 한쪽으로 몰아주어 간신히 이 길을 통과했지만, 첫 번째 관문을 넘고 나니 술에 취한 아저씨가 가까이 다가와 악수를 해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대담하지 못한 대신에 발이 빠른 나는 주정뱅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힘껏 내달렸다. 저 멀리 레스토랑과 호텔 하나가 보였고, 주유소가 연이어 있어 더는 무섭지 않았다. 보드베 수도원이 꽤 멀구나 생각하며 뚜벅뚜벅 걷고 있을 때쯤,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신혼부부가 나를 발견하고는 경적을 울려 차에 태워주었다. 


조지아 시그나기 근교, 보드베 수도원


    보드베 수도원은 성 니노의 유골함이 안치되어있는 조지아 정교회의 주요 성지 중 하나이다. 수도원 안에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니노의 샘물도 있어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의 표정은 차분하고 엄숙했고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성스러운 곳을 그저 '관람'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을 한참 동안 기다리는 것도 마뜩잖았지만, 더 간절한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고 싶기도 했다.

    비록 17세기에 재건되었다고는 하나, 무려 9세기에 건축되었다는 수도원의 외벽을 보며 아이러니하게도 신이 아닌 인간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마땅한 기계도 트럭도 없었을 시절에 신앙심 하나로 이 높은 곳에 교회를 짓고 보존해 온 사람들의 손길이 수도원 곳곳에 묻어있는 것 같았다.

    수도원 화단에 핀 꽃 너머로 보이는 대코카서스 산맥의 풍경 또한 정말 아름다웠다. 잘 가꿔진 꽃밭과 수도원 구석구석을 구경하다가 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며 여행자들을 구경했다. 대부분 단체 관광객들이었는데 국적도, 연령대도 매우 다양했다. 




    한 시간 남짓 수도원을 둘러보다가 시그나기로 돌아가기로 했다. 걸어서 되돌아가는 사람은 역시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은 늘 초행길보다 빠르게 느껴진다. 아까보다 더 경쾌한 기분으로 산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정면에서 나를 닮은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국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S다. 소심한 데다 낯까지 가리는 성격인데도, 이상하게 말이 술술 나오고 어색하지 않다. 순식간에 메신저 아이디를 교환하고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다.

    좀 더 걷다 보니 아까 보았던 레스토랑이 눈에 들어왔다. 음료수나 한 잔 할까 싶어 자리에 앉았는데, 뜻밖에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이 김경호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잠시 후, 종업원 '에티'가 다가오길래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90년대 한국 락발라드에 꽂혔다며 멜로디를 흥얼흥얼 잘도 따라 한다. 옆 테이블에 손님이 와서 서빙을 하며 바쁜 와중에 이웃 주민이 준 과일이라며 사과를 한 접시 깎아오는 에티. 고마움을 거듭 표하며 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느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가. 걸음수가 늘어가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발걸음이 가벼웠다. 레스토랑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만난 홍콩 사람 치우와도 통성명을 하고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그는 나를 바쿠에서 보았는데, 그땐 말을 걸지 못해 아쉬웠다며 신기해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를 한 후 창문을 열고 대코카서스 산맥을 바라보았다. 아직 4월이라 오후가 되니 제법 쌀쌀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사 온 나나 찻잎을 뜨끈뜨끈한 물에 띄워놓고 향을 음미하며 휴대용 스피커로 음악을 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감탄하며 '시그나기 사람들은 대코카서스 산맥을 보고도 감흥이 없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일상이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의식주 같은 기본적인 것들의 마땅함에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과 비슷할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다가 약속 시간이 되어 숙소를 나섰다.






함께하는 저녁


    성벽 안쪽에 있는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석양에 물든 대코카서스 산맥을 옆에 두고 한국 사람 S와 나, 홍콩 사람 치우가 마주 앉았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바로 메뉴판을 펼쳤다. 세 사람 모두 보드베 수도원을 걸어서 다녀와 허기가 졌던지, 빠른 속도로 메뉴 선택을 마치고 종업원을 불렀다. 채식주의자인 치우가 고른 '버섯 치즈 구이'와 조지아 전통 치즈 빵 '하차푸리khachapuri', 감자와 돼지고기를 볶은 '오작후리ojakhuri'. 모두 처음 먹어보는 조지아 음식이었다.



    하차푸리는 조지아의 주요 음식으로 조지아의 어느 레스토랑에서나 볼 수 있으며 지역별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이메레티 지방의 하차푸리는 '이메룰리 하차푸리', 아자리 지방의 하차푸리는 '아자룰리 하차푸리'와 같은 식으로 명명된다. 이날 먹은 하차푸리는 '메그룰리 하차푸리'였다. 치즈 피자와 비슷한 맛이었는데 조지아 전통 치즈의 풍미가 조금 색달랐다. 버섯 치즈 구이와 오작후리는 상상 가능한 맛이기는 하지만, 역시나 술구니 치즈의 진한 맛과 돼지고기의 육질이 남다른 맛을 선사했다. 눈부신 대자연에 이어 맛 좋은 음식까지... 하루하루가 쌓여갈수록 조지아를 좋아할 이유도 늘어갔다.


오작후리 / 메그룰리 하차푸리 / 버섯 치즈 구이


    어쩐지 S와 치우가 뿜어내는 공기는 편안했다. 까미노를 걷다 온 S는 나와 여행관이나 가치관이 너무도 잘 맞았고, 오전엔 일을 하고 오후엔 여행을 하는 치우는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억지로 노력하지 않는데도 대화가 술술 흘러갔다. 많은 질문과 답이 오갔는데도 입에서 나오는 문장들이 서로를 조금도 해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어떻게 여행을 하는지, 앞으로 어떤 경로로 여행을 할 것인지... 해가 완전히 넘어가서 사방이 컴컴해지기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밤이 깊어 레스토랑을 나서며 내일을 기약했다. 치우가 묵는 숙소의 단체 여행객이 다비드 가레자 투어에 나선다기에 자리가 나면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방향이 다른 나를 숙소 코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갔다. 시그나기의 둘째 날은 마지막까지도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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