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사람으로 진화하는 중.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식물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둘째 아이의 하교를 맞이했다. 꽃다지, 주름잎, 봄맞이꽃, 괭이밥 등 낮게 피어 자잘한 꽃들은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한들거렸다. 그 사이에 우람한 모습으로 탐스럽게 씨를 피운 민들레들이 많아서 아이가 반겼다.
구름 같은 민들레 씨는 날아야 한다. 그래서 날려 보냈다. 줄기를 꺽지 않고 발로 건드려 비행시키는 놀이를 몇 해 하고 있다. 제법 괜찮은 봄놀이라서 집에 오는 길이 즐겁다.
잘 날아가라 인사도 빼먹지 않는다. 그러다 지나가던 동급생이 몇 마디 했다. "어머, 쟤 왜 저래? 왜 발길질을 해? 민들레가 적은 아니잖아?"라는 곱지 않는 말투가 새침했다. 말이 바람처럼 스쳐갈 법한데 내 아이를 슬쩍 내려다보며 얼굴 표정을 살폈다. 서슴지 않게 뱉은 아이의 말이 잠시 맴돌았다.
손으로 씨를 날리면 되고 발로 하면 안 될까?
손으로 꺾어 입으로 불어서 날리는 건 되고?
줄기를 꺽지 않고 발로 날리면 안 되는 걸까?
발길질을 당하는 대상이 적이기만 한 걸까?
손은 깨끗하고 발은 더러운 건가?
매년 반복되는 아이와의 대화 거리를 떠올리게 해 주어 고맙게 여겼다. 집으로 향하는 길, 떠오른 질문들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둘째 아이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뭐, 걔는 그런 생각이 들었나 봐." 둘째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행여나 아이 기분이 상했을 경우, 식물을 해치려는 의도로 했던 행동이 아님을 엄마가 아니까 괜찮다며 달래주려 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아이는 상대의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가졌다. 괜히 내 자식 기분 상함만을 살피려던 나의 옹졸함이 부끄러웠다.
지나가던 아이의 새초롬한 말투에 곁에 있는 보호자의 반응은 없었다. 그 부분에 내가 민감하게 반응한 거 같아서 큰 아이에게 먼저 설명하고 물었다.
"동생 기분보다는 내가 기분이 좀 상하네. 그러면 동생을 대변하듯이 말을 했을 거야. 예쁘게는 말 못 했을 수도 있고. 그런데 걔 엄마가 있었다고? 그럼... 태도를 고쳐먹고 다정하게 말했겠지. 히히히히히"
남편과 서로 낮에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다가 아이와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가볍게 의견을 물어봤다.
"그럴 수 있지. 생각차이잖아. 그리고 1학년인데 그럴 만도 해."
엄마라서 매일 반성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 요인에 여유 없이 아이들 일로 너무 쉽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내적 뾰족함이 인간이 덜 되어서 그런가 싶었다. 너무 생각이 가벼웠고 예민했다. 별거 아닌 일이었던 거고 내가 과하게 반응을 한 이유를 찾으려 했다.
하교 때 있었던 그 순간의 말이 내 자식을 향한 비난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불편했다. 나처럼 어릴 때에 비난받고 자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작은 비난에 약해진다. 생각이든 언행이든, 곱지 않은 거부로 심기가 드러난다. 비난과 비판, 올바른 질책에 대한 판단도 길다. 아이들 덕에, 구름 같은 민들레 씨들 덕분에, 내 생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준 가족들 덕분에 마음이 누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