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의 언덕> 리뷰
내 유년 시절을 사찰당한 느낌이다. 상영 내내 이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영화 <비밀의 언덕>은 1996년 초등학교 5학년인 명은이의 삶에서 보이는 것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그 시절 세계의 전부는 집과 학교뿐이었다. 비슷한 시기를 지나왔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집과 학교는 세상의 전부이고, 그 세계를 채우는 사람들도 내 세계의 전부인 것이다.
어린 시절 겪었던 사건, 주변 인물들의 대사, 환경, 주인공의 성격까지 나의 어린 시절과 빼다 박아서 공감하다 못해 미소와 눈물이 번갈아 가며 새어나왔다. 그만큼 영화 <비밀의 언덕>은 현실 고증한 것 같은 섬세함이 돋보인다. 그 어떤 가족 영화보다 현실적인 한국 가족의 초상이 담겼다. 또 연출뿐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선, 사건, 앵글, 연기까지 튀어나온 부분이 없었다. 그 시절 10대 아이의 시선과 현재 어른들의 시선이 만나 영화관이 비눗방울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유난히 습하고 후덥지근한 올해 여름, <비밀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쾌청한 가을바람으로 땀을 식혔다. 언제나 가을바람의 냄새에는 왠지 모를 아련한 감정과 묘한 그리움 같은 것이 섞여 있다. 난 명확히 느꼈다. 명은의 삶에서 불어오는 가을의 냄새를, 어린 시절 추억의 향수를.
*영화 <비밀의 언덕>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는 숙제로 가족 신문을 만들어 오라고 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다 같이 모여 즐겁게 신문을 만들 수 있는 건가?’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 모두가 모인 저녁 시간 입을 열었다.
“학교에서 가족 신문 만들어 오래.”
나는 미소를 숨기고 엄마,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근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거 혼자서 만들 수 있지?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전지를 펼치고 크레파스로 가족 신문을 썼다. 가족 신문에는 답해야 하는 질문이 여러 개였다.
“근데 이거 질문도 많아. 이건 혼자 못하는데.”
그러자 엄마는 “알아서 지어서 써. 아빠한테 물어보든지.”라고 했다.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난 어린이었지만, 어린이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가족신문이나 그렇듯 가족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리고, 나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인지, 형제는 어떤 사람인지 적어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결론은 부모님을 존경해야 하고, 형제와는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화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빠는 ~ 사람이고요, 엄마는 ~ 사람이에요.’ 라고 적은 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정입니다.’ 를 적어야 했다. 이 부분에서 멈칫했다. 그때 떠오르던 고민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나는 정말 ‘화목한’을 쓰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어떤 집이 화목하지 않으면 어떡하라는 이야기지? 그럼 가족 신문은 화목한 가정만을 위한 신문인 건가? 다른 말을 써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이나 연필을 들고 고민했다. 반항하고 싶었고, 다른 말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다른 말을 적지 못했다. 가족 신문은 선생님이 보고, 교실 뒤 게시판에 붙여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아빠에게 가훈을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빠가 깨달은 듯 외친 말은 ‘자기가 맡은 일은 스스로 하자’였다. 그리고 아빠는 멋들어진 글씨로 가훈을 적어주었다.
그때 그 시절의 내가 가족 신문을 만들던 것처럼 ‘가정환경조사서’도 꼭 하는 활동 중 하나였다. 가정환경조사서란 각 가정 부모님의 직업, 사는 곳, 가훈 등을 조사하는 것이다. 명은이도 나처럼 가훈을 알아와야 했다. 가족들이 모여 밥을 먹는 저녁 시간, 명은이는 가훈을 묻는다. 명은의 엄마와 아빠는 잠시 티격태격하더니 엄마가 깨달은 듯 한 문장을 내뱉는다.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이 문장은 그녀의 삶을 또렷이 보여주는 말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악착스럽게 살아왔을 그녀의 삶에는 기대했던 관계가 무너지거나 지킬 수 없던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던진 한 문장은 자신을 지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훈으로 내뱉는 순간 가족을 지키는 말이 되었다. 기대하지 말고 살아라. 결국 주지도 받지도 말자는 다짐은 사람에게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명은이는 그 말이 부끄러웠다. 불우이웃을 지나치지 못하던 명은이에는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는 말이 인정도, 포용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엄마의 인생이 담긴 한 마디였다.
명은이는 사랑받고 싶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 어린이였다. 똑똑하고 지혜롭고, 아이디어도 많은 통통 튀는 아이다. 이런 아이가 반장선거를 나가지 않는 건 좀 이상하다. 역시 명은이는 도전한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당차게 반장선거에 도전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가게까지 뛰어온 명은이는 가족들에게 반장이 되었다고 전하지만, 의외로 부모님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엄마는 말한다.
“반장이 되면 귀찮은 일투성인데 그걸 왜 해. 물러!”라고.
사실 그때 그 시절 반장은 간식도 많이 돌려야 했다. 햄버거나 콜팝은 물론이고 피자를 돌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마디로 돈 없는 집 자식은 반장도 못하는 거였다. 그리고 선생님과 학생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이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은 학부모 총회에 꼭 나가야 했다. 그래. 어떻게 보면 명은이 엄마의 말대로 반장선거는 ‘학부모’가 귀찮은 일투성이다. 특히나 아침저녁으로 쉴 틈 없이 몸을 쓰는 사장님에게는 말이다.
그리고 반장의 의무 아닌 의무인 ‘간식 돌리기’는 어느 날 저녁 식탁 위의 주제가 된다. 다행히 명은의 아빠가 그 부탁을 들어 주고, 다음 날 아침 교실로 간식이 도착한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명은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받는다. 그런데 간식은 바나나였다.
자극적인 패스트푸드를 기대했던 아이들에게 바나나는 너무 건강한(?) 간식이었다. 가관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다. 아이들이 잘 먹지 않았던 바나나는 책상 위로 아래로, 휴지통에 나뒹굴고 바나나 껍질이 삭으면서 벌레가 꼬이고 악취가 나기 시작한다. 어쩜 명은의 부모는 선택해도 이런 과일을 택했는지!
시간이 지날 수록, 시선이 남겨진 바나나에 옮겨갈 수록 명은의 마음은 바나나의 껍질처럼 까맣게 타들어 간다. 당황스러웠던 마음은 창피함으로, 미움으로, 분노로 번져간다. 섬세하고 고운 12살 명은의 마음에는 억울함이 가득찬다. 그 속상한 마음이 내게로도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러나 바나나에는 문제가 없다. 명은이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문제는 없다. 학생들과 선생님에게도 문제는 없다. 그래 사실 모두에게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명은이는 수치심을 느꼈다. 명은이에게 수치심을 가져다 준 것은 타인의 시선이었고, 왜곡된 마음이었고, 섬세한 마음을 어루만지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백일장에 굉장히 많이 나갔다. 그래서 명은이와 더욱 비슷하다고 느꼈다. 초등 1학년부터 중고등학생 때까지 글 쓰는 일은 내가 공부만큼 자주 했던 활동이었다. 교내 대회에 나가 크고 작은 상들을 받고, 자연스럽게 교외 대회에 나갔다. 그래서 국어 선생님은 늘 내 손을 잡고 여러 대회를 소개해주셨다.
통일 글짓기 대회를 한다고 실제로 통일 전망대를 가는 학생이 있다면 어떨까? 명은이는 그런 학생이다. 주제에 대한 글쓰기를 위해 도서관에 가서 관련 책을 전부 뒤져서 찾아보고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고 필요한 키워드와 지식을 습득하여 자기 경험을 녹여 글을 쓰는, 그런 학생이다.
나 또한 명은이처럼 굉장히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너무나 모범적으로 글을 쓰고,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는 어른들이 읽는 전문 서적을 서슴없이 찾아 읽고 공부하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큰 상은 받지 못했다. 교내에서는 최우수상을 받아도, 교외에서는 대상은 고사하고 장려상을 받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늘 내 글에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그게 뭔지는 몰랐다.
명은이도 그랬다. 점차 글쓰기 실력이 늘어서 상은 받아 가는데 큰상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웬 전학생 두 명이 최우수상을 쓸어가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차마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솔직함이 담겨있었다. 솔직했고, 담백했고, 어쩌면 10대가 쓴 글이라고 생각하기에 마음이 아린 글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진심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이었다. 명은이는 그들을 질투했지만, 금방 친구가 된다. 어떻게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냐는 말에 전학생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답한다.
“우리는 한 시간만에 써! 있는 그대로 써. 되게 쉬워.”라고.
사람은 자기가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꽤 오랜 시간 그랬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무언가 새로운 거짓말을 지어하기 보다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난 일기장에도 진짜 감정을 쓰지 않았고, 누군가 읽을까봐서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전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더 이상 일기장에 거짓말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 생각도, 표현도, 가치관도 명확해졌다.
그러자 세상이 정해놓은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창피함도 더이상 내것이 아닌게 되었다.
10대에는 가족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주를 이루었다. 인생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도 슬프게 한 것도 전부 집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명은이처럼 비밀을 하나 숨기며 살아갔다. 학교에 가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도 하고, 잘 지내던 친구들에게 말을 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털어놓기도 해보았지만, 어떤 방법도 어린 시절 나의 깊고 아픈 상처를 치료해 줄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면서 깨달은 것은 가족에 대한 내 감정이 애증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난 한편으로는 기대했고, 내가 원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렸다. 그 모습이 아닐 때 크게 실망하고, 그들을 나의 입맛대로 바꾸려고도 했다.
이 생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난 여전히 보편적인 가족에 대한 기준이 사회문화적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행복의 모습보다 존중의 태도를 먼저 배우면 어땠을까 싶다. 행복의 모습은 한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려서 그랬다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다. 배우지 못해서였다. 나는 그런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사회에서 제시하는 가족관과 다양한 가족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아동도서, 미디어, 교과서에서는 여전히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그 기준을 제시한다. 이것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수치심을 가져다주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 쓰라린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는 여전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20대가 되어서야 명은이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 명은이의 행동과 생각을 보며 그것이 이상하고 창피한 것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명은이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느끼던 솔직한 마음을 글로 써내려 나간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명은이의 거짓은 입상을, 진실은 대상을 받았다. 선생님께 제출했던 작품은 행복하고 화목한 이야기만을 담은 글이었고, 명은이 따로 제출한 작품은 어쩌면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솔직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거짓은 실력을 입증하게 했지만, 진실은 이름을 날리게 했다. 기쁜 마음도 잠시, 명은은 대상을 받고 싶지 않아졌다. 모든 이야기가 신문에 그대로 실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상을 거절하려고 하는 명은이는 당황하는 선생님께 마침내 이유를 털어놓는다.
‘제 이야기가 가족들에게 상처가 될까 봐 두려워요.’
그러자 선생님은 풀기 쉬운 문제를 만난 것처럼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쪽지에 답장을 휘갈겨 보낸다.
‘명은이는 가족을 정말 사랑하는구나!’
아, 사랑이었구나. 선생님의 답변은 내게로도 왔다. 분명 나 말고 다른 관객의 마음에도 꽂혔을 것이다. 난 그 말이 정말로 위로가 됐다. 정말로 안심이 됐다. 내가 느끼던 불편한 감정, 명은이 느끼던 불편한 감정은 바로 '가족을 미워해도 괜찮을까'하는 죄책감이었다. 그 불편한 감정은 사랑하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비밀의 언덕>을 보며 명은이가 넘은 언덕을 나도 넘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제 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됐다. 가끔은 부끄럽고, 가끔은 정말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가끔은 왜 저렇게 말하고 행동할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각기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명은의 엄마는 상장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고, 명은의 아빠는 고기집에 데려간다. 명은의 오빠는 따끔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으며, 명은의 할아버지는 손녀의 루틴에 그대로 따라준다. 그리고 명은의 삼촌은 양복을 입고 멋진 차림으로 하굣길 마중을 나온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말로써 사랑한다고 사랑이 아니라 각기 다양한 행동과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다. 명은이의 가족이 보여준 사랑은 조금은 어색하고, 조금은 서툴고, 조금은 무뚝뚝하지만 나는 그것이 사랑으로 보인다. 10대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20대가 되어 보인다.
엄마가 바쁘게 차려놓는 밥상이나 늦은 밤에 연락오는 동생의 전화, 아빠가 가져다주는 반찬 같은 것들도 명은이 받았던 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심하고 무뚝뚝한 한국 가족의 사랑은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부족한 가족을, 부족한 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영화 <비밀의 언덕>은 가족과 친구를 매개로 한 부끄러움과 수치심, 진실과 거짓, 사랑과 모순에 대한 이야기다. 10대에 느끼는 명확하고도 솔직한 감정은 사회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규범 속에서 원치 않는 방식으로 숨겨지게 된다. 그리고 맑고 투명한 진실의 감정은 수치심과 만났을 때 진심과는 정반대의 모양으로 변화한다. 부끄러움에 부끄러움이 두 배로 더해지거나 죄책감을 느끼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형태로 말이다.
이런 마음은 진심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치유되고 가장 빠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 같다. 명은이는 진심의 아름다움과 그 마음을 헤아려 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기에 비밀의 언덕을 넘을 수 있지 않았을까? 혼자서 깨닫기 어려운 그 마음과 변형될 수 있던 마음을 잡아주던 사람들이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건 생각하는 마음이야.’라는 말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