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2023 SPAF 샤요 국립무용극장, 익스트림 바디
이번 여름은 이벤트로 가득했다. 신기한 인연과 좋은 만남, 재밌는 일을 잔뜩 마주하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여름에는 이벤트였던 일들이 익숙해지고, 마음도 날씨처럼 찬물을 끼얹은 듯 폭하고 가라앉았다. 가을바람은 이제 정신 차릴 때라고 알려주는 듯했고, 새롭던 일상이 익숙해진 뇌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고 아침 밤낮 할 것 없이 신호를 보냈다.
최근 내가 가장 관심 있던 것은 도전과 관련 있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지만, 극한의 도전이나 스포츠, 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할 수 있는 무언가에 목말라 있었다.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마침내 큰 기쁨을 수확할 수 있는 자극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기에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고,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고, 무언가를 창작하려고 머리를 싸매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하고 어떤 날은 계획한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괴로워했다.
이 시기에 하루 종일 메시지를 보내던 뇌의 욕구 때문에 무엇이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가을은 이런 욕구를 채워주기에 충분한 행사가 잔뜩 열리는 계절이다. 영화제, 공연제, 미술제 할 것 없이 좋은 예술축제들이 앞다투어 열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SPAF(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을 찾았다. 이번 2023 SPAF의 주제는 <경계없는 질문들>. 그중에서도 개막작인 <익스트림 바디>가 눈에 띄었다. 무용 축제 개막작인데 무용수가 등장하지 않는 공연이었다.
클라이밍, 줄타기, 아크로바틱, 서커스의 요소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스포츠일까, 무용일까, 아니면 예술 그 자체일까. 어떤 키워드로 보나 익스트림 스포츠의 특성은 새로운 도전과 자극을 갈망하던 나의 욕구를 간접적으로나마 채워주기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기대는 예상보다 더 크게 충족되었다. <익스트림 바디>는 내게 새로운 자극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6일,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샤요 국립무용극장의 <익스트림 바디>를 보고왔다.
콘셉트 라시드 우람단
출연 조엘 아주, 타밀라 드 네예르, 클로테르 푸슈로, 자비에 머모드, 패트리샤 마인더, 세페 반 루베렌, 막심 세거스, 오웬 윈십, 앙투안 크레티논, 카밀 두마스
제작 샤요 국립무용극장
실내 클라이밍 센터에서 볼 법한 인공암벽과도 같은 흰색 거대 벽이 무대 위에 세워져 있다. 시작과 동시에 인공암벽은 영화관의 스크린으로 변한다. 어두워진 공연장의 한 면을 채우는 광활한 자연. 높은 산과 산을 잇는 가느다란 선. 그리고 그 선을 횡단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프랑스의 줄타기 선수 나단 폴린(Nathan Paulin)이다. 그는 바라만 보아도 심장이 짜릿해지는 높은 산 정상에서 줄 하나에 의지해 걸어 나간다. 그의 손과 팔은 양팔 저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움직임은 초 단위,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의 시간 동안 빠르게 움직이고 그의 근육은 팔의 움직임보다 더욱 끈끈하게 그의 몸을 붙잡고 있다. 나는 그의 걸음걸음마다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숨을 죽이며 그의 횡단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산 위에서의 줄타기는 중력을 견디는 것 외에도 다양한 미션이 주어지는 익스트림한 도전이다. 바람은 대지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거세지기 때문이다. 그는 바람의 무게 또한 느끼며 걸어나간다. 나단 폴린은 바람과 소리, 자연의 여러 존재를 느끼며 그 모든 것에 자신을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의 압력마저 계산하며 걸어나가는 그 한걸음은 대지에서 내가 내딛는 한걸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의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단 폴린의 도전과 성장의 과정은 걷는 행위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졌다.
누군가 쉽게 내딛는 한걸음이 누군가에게는 몹시 어려운 한걸음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한걸음이 될 수도 있다. 아기가 땅 위에 올려놓는 첫걸음마, 부상을 입은 사람의 한걸음 등 일상적인 행위로 여겨지는 ‘걸음’의 행위에서 환희, 고통, 슬픔, 기쁨 등의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그는 한참 횡단에 집중하다가 줄의 가운데쯤 왔을 때 턱하고 앉아버린다. 그는 위아래로 흔들리는 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는 듯 잠시동안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단 폴린이 보여주는 대자연에서의 횡단은 스크린을 통해 사적인 시간을 넘어 고독하고 위대한 퍼포밍이 된다. 나는 그 놀라운 움직임을 바라보며 그가 그렇게 균형을 잡을 수 있기까지의 시간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 몇 번이고 줄을 타며 수없이 많은 생각, 번뇌와 두려움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는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이 겪은 두려움은 직접 행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가 계속해서 줄을 타는 행위는 하나의 욕구에서 온다. 그는 자유를 갈망한다. 몸과 정신을 전부 컨트롤해야하는 강력한 통제 상황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음악이 좀 더 커지면서 스크린 속 사람이 화면 밖으로 나와 무대 위를 횡단한다. 나단 폴린의 그림자가 흰 벽에 드리워지면서 그가 줄을 타는 동시에 암벽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줄을 거의 다 횡단했을 때쯤 암벽 위에 서 있던 여덟 명의 아크로바틱 선수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등장이 너무나 극적이어서 소름이 돋고 동시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고독하고도 치열한 도전을 이어가던 나단 폴린의 퍼포먼스 뒤에 나타난 여덟 사람의 존재는 연대의 느낌으로 와닿았다.
이후로 곡예사들의 다양한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이들은 마치 줄 위의 나단 폴린을 동경하듯 그를 바라보며 줄을 향해 가닿으려고 뛰고, 벽을 타고, 서로의 몸을 밟아 올라간다. 한 명이 두 명을 들어 올리고, 선수들은 2인 1조로 걸어 다니다가 놀라운 속도로 해체하고 합체하는 것을 반복한다.
수십 개의 형태로 변형되는 그들의 상승 하강의 퍼포먼스는 대지 위의 인간을 떠올리게 했다. 갈망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성공을 위한 무수한 실패를 겪는 고단한 움직임들, 그 역동적인 움직임은 자체만으로 눈물겨웠다.
나는 이들이 보여주던 상승과 하강의 무한 굴레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수없이 반복되는 그들의 시도는 형태적으로, 행위 자체로 아름다웠다. 이들이 보여준 기술적 움직임은 나단 폴린과 니나 카프레즈 각각이 쌓아온 서사 안에서 ‘행함’이라는 상징으로 변했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위를 향하고 내려오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행함, 시도는 아름다웠다.
8명의 곡예사중 한명이었던 니나 카프레즈(Nina Caprez)의 주 활동무대는 험난한 산 암벽이다. 그녀는 스위스의 클라이밍 선수로 나단 폴린과 마찬가지로 대자연에서 자신만의 도전을 이어 나간다.
그녀는 암벽을 타며 두 명의 자아와 동시에 만난다. 암벽등반을 익숙하게 해내는 자신과 자연에 귀속되어 암벽의 온도를 느끼는 자신. 그녀는 자신이 암벽을 타다 보면 우주의 먼지가 된 것처럼 자연의 아주 작은 부분이 되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연에 복종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도전은 적극적으로 자연에 종속되는 행위다. 나는 그들의 행함을 바라보며 다른 세상의 일을 구경하듯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며 호기심을 가졌다. 경외감과 호기심. 두 감정은 저울질하듯이 공연 내내 무거워졌다가 가벼워지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들의 행함은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라고, 계속해서 질문하게 했다. 그렇게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흔들렸다.
니나 카프레즈는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와도 같은 사고를 무대 위로 꺼내놓는다. 곡예사들은 높은 강도로 훈련하는 전문가들이지만, 여러 부상의 위험과 예측할 수 없는 사고는 피할 수 없다. 그녀 또한 그랬다. 사고는 그녀가 공중에 떠 있을 때 벌어졌다. 도착지가 사라진 곡예사는 방향키를 잃은 항해사와도 같다. 공중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해 버린 그녀는 누군가의 몸에 떨어졌고, 아이러니하게도 다친 사람은 자신이 아닌 상대방이었다. 그녀는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나는 어디도 다치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이 사고는 그녀가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데 큰 두려움으로 작용했다. 곡예에서 한 번의 실패는 치명적이고, 그 실패는 신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지는 동시에 심리적 고통으로도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심리적 고통은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 만큼 위험한 것이 되기도 한다.
두려움은 몸을 경직시킨다. 사고를 정지하게 만들고, 더 이상 새로운 계획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녀는 의심하게 됐다. 성공에 대한 의심, 훈련에 대한 의심을 말이다. 열심히 노력해도 다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느낀 이상, 두려움의 씨앗은 도전의 순간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녀는 개인적인 상처의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이 이를 어떻게 인지하는지 그리고 이것을 극복했는지, 하지 못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 질문을 만들고 대답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을 깨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믿음은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에서 오는가?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다. 자신의 믿음이 스스로의 미래를 만든다. 결국은 두려워도 행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요즘은 전과 달리 위험한 것들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과보호의 시대다. 한국만 봐도 아이들이 위험 요소를 경험할 일이 적어졌다. 놀이터 바닥이 폭신한 우레탄으로 바뀐 지 오래고 정글짐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해체되었으며, 학교에서도 몇몇 스포츠 활동은 다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 의해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아이들은 더 이상 놀이터에서 뛰어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익스트림 바디는 과보호의 시대에 ‘위험할 수도 있는’ 스포츠 활동, 움직임 활동이 왜 필요한지 말해준다. 사고는 순식간에 찾아온다. 그것을 피하려면 위험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위험 요소가 들어있는 활동을 피해버리면 위험의 정도를 감지할 수 있는 센서를 키울 수 없게 된다. 여러 환경과 상황 속을 겪어야만 알 수 있는 일상의 여러 위험 신호를 생활 놀이와 스포츠로 배울 수 있어야 하는 데 이와는 반대로 아이들은 점점 온실 속 화초가 되어가고 있다.
하나의 줄로 만드는 여정, 생과 사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익스트림한 바디들.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하고 깨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특히 그 과정의 난이도만큼이나 경이로웠던 행함이 기억에 남는다.
나단 폴린, 니나 카프레즈가 겪은 한계의 도전과 실행은 스크린을 통해 개인적 경험 그 이상으로 확장된다. 그들이 자연 속에서 종속되고 도전하며 기록한 일들은 아주 사적이고도 고독한 경험들로, 스크린을 통해 그 일부만이 전달될 뿐이지만 그들의 내레이션을 통해 한 개인의 역사 중 방점을 찍었던 놀라운 경험을 느껴볼 수 있었다.
나는 공연 초반부부터 끝난 직후까지 중간중간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는 나뿐 아니라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옆과 앞과 뒤에서는 눈물을 닦거나 콧물을 훌쩍였다. 모두 그 광경을 보면서 말로는 이루어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과 감동을 느끼지 않았을까.
공연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하나의 공이 되어 내가 만들어 둔 도미노 트랙을 건드렸다. 내게 더 큰 미션과 성장을 위한 갈망, 단 하나의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의 도미노는 또 다른 누군가의 도미노를 건드릴 것이다. 그들이 쏘아 올린 공이 도미노처럼 나와 타인, 누군가의 삶에 가닿길 바라며. 아름다운 용기와 실존적인 경험을 전달해 준 ‘샤요 국립무용극단’에 감사의 박수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