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리뷰|조영주 개인展 : 카덴짜 (송은 아트스페이스)
간만에 좋은 전시를 봤다. 어려웠지만, 걷다보면 이해할 수 있는 전시다. 작품은 계속 내게 물음표를 던지고 생각해볼 것을 쥐어줬다. 난 작가가 보여준 이미지와 기호 속에서 내 나름의 역사와 생각을 꺼내 빗대어보고 조합했다. 그 과정이 활발하게 이어졌던 전시, <카덴짜> 리뷰를 시작한다.
조영주 : 카덴짜
2024年 3/8 ~ 4/14
송은 아트스페이스
공간 소개
송은 아트스페이스
송은 아트스페이스는 비영리기관인 송은문화재단에 서 운영중인 공간이다. 유망한 동시대 미술작가들을 발굴하고 국내 작가들을 꾸준히 지원하며, 2001년부터는 송은미술대상을 제정하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송은미술대상은 공정한 심사를 거치며 매년 한국작가를 지원하고 있는데, 대상 수상자는 상금 수여와 함께 송은의 공간을 지원한다. 2020년도 제 20회 송은미술대상 대상수상자였던 조영주님의 개인전 <카덴짜>가 이곳에서 전시중인 이유다. 송은에서는 좋은 작가와 전시를 선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무료로 전시를 개방하고 있다.
https://www.songeunartspace.org/ko/index
이곳을 와보고 싶었던 것은 송은 문화재단의 활동만큼이나 흥미로웠던 송은 아트스페이스의 공간 자체다. 건축이 독특하고 멋져서 전시 경험이 더욱 좋을 것 같았다.
도착해서 구경해보니 역시나 멋지다. 특히 지하부터 로비까지 연결된 저 통로가 신비로움을 가중시켰다. 저 구멍을 통해 아래서부터 들려오는 작품의 음향 소리는 로비까지 잔잔하게 공명했고, 지상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은 지하 전시장으로 자연스럽게 떨어져 작품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카덴짜>는 지하 3층에서부터 시작해서 지상 3층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루트로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산 신체 해후> 2024, 비디오 설치, 2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20분 36초
화면에는 개성이 뚜렷한 네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대사는 없지만, 그들의 차림새와 행동만으로도 이들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서 미디어에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처럼 익숙하고, 전형적인 느낌이 풍겼기 때문이다.
핑크색 상의의 여성은 주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액션을 취한다. 그녀는 머리띠, 레이스가 달린 옷 등 소녀스러운 취향을 가졌다.
파마를 하고 옥색 가디건을 입은 여자는 얼굴이 앳되어 보인다. 그녀는 가디건과 비슷한 색의 아이셰도를 칠했다. 전체적으로 요즘 시선에서는 촌스러운 느낌이 강하다. 그녀는 차림새만큼이나 행동거지 또한 어린 시절 티비 광고에서 본 여성을 떠올리게 했는데, 80-90년대의 요조숙녀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손에 작은 책을 쥐고 뒷짐을 지다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하다가, 서성이며 책을 읽다가, 누군가를 찾으러 기쁜 표정으로 뛰어간다.
세미정장에 안경을 쓴 사람은 커리어우먼을 떠올리게 했다. 스트레스로 예민해져 있는 직장인의 얼굴. 그녀는 자켓을 입었다가 벗었다를 반복한다.
마지막 한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 볼드한 귀걸이는 반짝이고, 구두 위로 보이는 스타킹은 핑크색의 현란한 무늬를 하고 있다. 눈매를 길게 뺀 뾰족한 아이라이너와 빨간 입술. 그녀는 끊임없이 옷 매무새와 화장을 열심히 고치며 자신의 겉모습을 확인한다.
그렇게 모든 캐릭터를 파악하는 중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과거에도 현재에도 어디선가 볼 수 있는 차림새의 여자들인데 난 이들의 아이라이너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얼굴에 전혀 맞지 않은 분장을 한 것 같았고, 그 두가지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이 여성들은 왜 어울리지도 않는 화장을 하고 있는걸까?
끝으로 갈 수록 나는 이 네 여성의 행동묘사와 옷차림, 화장 등 외면적인 부분에서의 불쾌감을 느끼게 됐다. 처음에는 어색함과 이질감 정도로 느껴졌던 감정이 나중에는 기괴하다는 생각으로 변했다. 여성다움을 연기하는 사람들. 그 연기 때문의 개인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았다. 기이하고 불편해보였다.
작품은 두개의 영상을 동시에 상영하는 식으로 전시된다. 제작 당시 현장에서도 라이브로 촬영을 진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상 속 두 사람은 전시장에, 두 사람은 주차장에 있다. 그리고 이들의 공간과 상황은 서로의 공간에서 또다른 스크린(배경)을 통해 보여진다.
이러한 구성 때문인지 나는 그들이 평행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분리된 동시에 함께 존재한다.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연결되어 있다.
작품 속에서 누군가의 현재는 누군가의 배경(스크린)이 되고, 사건은 동시에 일어난다. 네 명의 여성은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스크린을 바라보며 각자의 세계를 응시하고 관찰한다. 상대의 세계를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게임속 npc 캐릭터처럼 서로의 공간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그들은 개별적인 사건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느낀다. 누군가는 화나보이고, 누군가는 불안해보이며, 누군가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상황은 점점 고조된다.
특히 화려한 차림을 하고 립스틱을 덧바르던 여자는 정말 불안해보였다. 몸에 불편한 옷을 끼워 입고, 상이 비추는 곳이면 어디든 뛰어가 자신의 얼굴을 살피고, 머리를 풀었다가 묶었다가 반복하고, 스타킹을 올리고, 다시 거울을 확인하고.
그래서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난 그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녀는 마치 원치 않는 불편한 가면을 쓰고,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긴장감이 높아진다. 불편함이 고조된다. 그 순간 이들은 서로를 보기 시작한다. 이들은 두 사람씩 상대를 바라보며 접촉을 시도한다.
영화로 치면 절정의 순간, 난 이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다. 한 사람이 다른 한사람에게 손길을 내미는 형식으로 이들의 컨택이 시작된다. 그들은 서로를 직접적으로 만지지 않지만,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인지한다. 끊임없이 화장을 고치며 불안해보였던 여자는 커리어우먼 스타일의 여인에 의해 감정을 가라앉힌다. 그림을 그리던 여자는 파마한 여자를 달래는 듯 시선을 응시한다. 그녀의 컨택은 상대에게 눈물로 위안이 되는 모습을 보인다.
작품 속 스크린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제 2의 우주, 또다른 과거와 미래의 순간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커리어우먼 같은 젊은 여성의 미래가 진한 화장의 여성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과거의 그녀가 미래의 자신을 위로해주는 듯 느껴지기도 했으며, 지나가던 행인인 그녀가 불안해보이는 여인에게 다가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첫 작품 감상을 마치고 3층으로 향했다.
<이산 신체 재회>도 앞선 작품처럼 2개의 연관된 영상을 동시에 상영하는 식으로 전시되었다. 이것은 앞선 작품보다 2년전에 만들어졌다.
화면속 여자들은 비극적인 비명을 쏟아내며 뿌리치고 쏟아내고 무너져 내린다. 지친 채로 누워있다가 다시 일어나고, 부산히 움직이다가 서로를 껴앉는다. 이들의 움직임은 분노와 연대를 오가며 공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 작품 또한 뒤로 갈 수록 메시지가 뚜렷해지면서 감정 또한 용암처럼 솟아올랐다.
그러나 처음엔 이 작품을 보면서는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중간 일어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만 보려다가 다시 앉는 것을 두 번정도 반복했다. 찰나의 순간이긴 한데 거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반복적인 움직임이 많고, 음악과 상황도 긴장감을 계속 올린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화면을 향해 삿대짓을 하는 사람들이다. 네 사람은 비슷한 감정을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전하는데, 누군가는 격하게 누군가는 억누르면서, 누군가는 해탈한 듯이 전한다. 그리고 이 행동은 너무 오래 반복된 나머지, 이들의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시키다 못해 격렬함의 끝으로 내달리는데, 그것이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분노나 어떤 맥락안에서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그 움직임은 나중에는 동작만 남고, 지친 감정을 느끼는데 집중하게 해주었다.
참 눈물겨웠다.
나도 울고, 옆에서 보던 어떤 남자도 울었다.
작품의 정체는 악보였다. 이 악보는 소나타로 변형되어 아래에 나오는 영상 속 음원이 된다.
영상 속 등장하는 사람은 작가 본인이다. 난 이 움직임이 재밌어서 보면서 계속 꼬물꼬물 따라했다.
두 작품은 육아와 돌봄의 과정을 담았다. 아이의 생리적 패턴을 음으로 변환하여 나타낸 것이 앞선 악보이고, 그녀는 그것을 소나타로 만들어 그 음악에 직접 춤을 춘다.
병원이나 심리치료실 같은 치유의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이곳은 설치된 영상에도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실제로 가정집, 어린이집, 병원, 요양원 등 돌봄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설치 작품이라고 한다. 저 흰색의 쿠션이나 바닥 매트도 의료용으로 쓰이는 재활 치료 도구와 같은 소재라고. 어쩐지 아주 푹신 푹신하고 기분도 좋았다.
관람객은 이곳에 들어가 누워도 되고 똑같이 영상을 따라해도 된다. 나도 보자마자 냉큼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았다. 이런거 너무 좋다. 크크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전세냈다.
영상 속 동작은 혼자보다는 두사람이 함께 가서 같이 따라해보면 좋을 것 같다. 재활전문가, 심리치료사 등 전문가들이 만든 동작이라고 하던데. 육체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안정을 주고, 가족이나 친구, 연인 등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활동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거나 기대거나 하는 일.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그런 접촉을 하지 않는 요즘이니까.
혼자 따라하는 데 한계가 있긴 했지만, 영상으로 보는데도 재밌고 치료에 사용되는 이 폭신한 소재의 쿠션 들을 만지고 가지고 놀아볼 수 있어 좋았다.
동영상 가이드 속에는 서로의 아픈 부위를 바라보면서 몸을 맞대는 장면이 있었다. 영상 속에는 아빠와 아들로 보이는 사람들, 친구 관계의 사람들이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 두 분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서로 목과 목을 기대어 어깨에 겹치고 정면을 바라본다. 그때 다른 참여자들의 행동을 볼 때와는 다른 묘한 감정을 느꼈다.
마지막 작품을 보기 전,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조영주님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도서도 열람할 수 있다.
공간이 참 멋지다. 안으로 들어오는 자연광, 높은 층고의 개방감, 영화 상영관 같은 스크린. 여기 앉아있기만 해도 재밌었다.
드디어 카덴짜의 마지막이다. 제목은 <솔리스트들>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들으며 감상할 수 있다
처음에는 맨 앞부분부터 본게 아니라서 잘 몰랐다. 영상이 다시 처음부터 나올 때 소개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상 속 노래하는 사람들은 동대문구 가족센터 행복메아리 합창단이다. 이 합창단은 대부분 이주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그리고 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그들의 이름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소름이 쫙.. 돋았다.
설명을 읽고 나서 영상을 보니 느껴지는 바가 달랐다. 가사를 자세히 들어보니 노래가 이들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명의 이름이 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참 상징적이었다. 자신들의 이름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합창단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많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들의 개인적인 역사를 말이다.
이곳에서 얼마나 자주, 많이 이름으로 불려졌을까? 이곳에서 어떤 삶이 있었을까? 왜 노래를 부르게 됐을까? 등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삶의 흔적을 노래로 느꼈다.
그들의 이름은 이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재탄생한다.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역사는 이곳에서 작품으로 탄생하며 상징적인 서사가 된다. 합창단원들이 보여준 에너지와 미소, 표정, 노래가 나에게는 남다르게 와닿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담백한 매력이 있는 노래였다. 그런 미소와 음악을 보여주고 들려주어서 감사했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기쁨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분들 노래를 행복하게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잔뜩 안고 밖으로.
분명 어렵긴 한데, 일단 집중이 잘되고, 더 곰곰히 생각해보고 싶은 작품들이 많아서 좋았던 전시다. 작가의 메시지나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잘 느껴졌다고 할까..
전시 이후 감동을 가라앉힐 겸 카페에 가서 브로슈어를 정독했다. 브로슈어가 정말 잘쓰여졌다. 진심으로 쓰여진 글이라는 걸 알겠다. 덕분에 전시에서의 감상을 심화할 수 있었다. 에디터의 관점도 느껴지고, 글 자체도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친절하게 쓰여진 글이었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조영주의 목표가 전형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형성을 더럽히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파괴는 단 한 번 일어나지만 오염은 여러 번 반복될 수 있다. 무엇보다 오염의 최악인 점은, 그것이 보이는 방식으로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든 강한 전염성을 띤다는 것이다.
감상 끝.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