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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Apr 13. 2024

문명 속의 나는 정글을 꿈꾼다

무용 공연 리뷰|국립현대무용단 <정글>

날카로운 햇살 아래 시퍼렇게 우거진 녹음. 인적 없는 숲 속 끓어오르는 자연의 소리. 얼굴보다 큰 나뭇잎이 그늘을 만들고 형형색색의 꽃이 매혹하는 곳. 가본 적도 없는 곳을 그리워한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열대우림 속 정글을 동경해왔다. 이젠 그것이 환상인 것을 알지만, 정글을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두근거린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정글>이 기대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개인적인 취향이 컸다. 더불어 ‘프로세스 인잇’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서 듣기도 하고 최근 kncdc의 봄학기 무용학교에서 피닛을 경험해 보니 그 방법론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어떤 모양일지 궁금해졌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2024.4.11.(목) - 4.14(일)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예상대로 <정글>은 서사가 있기보다는 보는 이의 해석이 자유롭게 개입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글>을 감상하며 타 무용공연을 볼 때보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정글>이 눈부시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고, 감동적이었다. 그렇기에 장면을 붙잡으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아름다운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저 행복한 숨만 거칠게 몰아쉴 뿐이었다. 더불어 <정글>의 연출은 무대 위의 판타지를 극대화했다. 조명과 음향은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며 구체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었다.


정글은 원근적인 구도로 펼쳐진다. 그 의도대로 관객은 정글 속 많은 요소를 조망하게 된다. 그렇기에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에 집중할지는 본인의 선택이다. 자연스레 시선은 내 취향과 흥미에 맞는 몸과 움직임에 꽂힌다. 한편 이런 구조는 장면을 편식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서사 없는 공연에서 조망하는 구도까지 더해지다 보니 시선이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런 면에서 몰입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균일하게 유지되기 어려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그만큼 마음속 갇혀있던 판타지가 무대 위에서 신나게 뛰어놀 수 있던 공연이다. 이번 리뷰에서는 무용의 표현이나 연출적인 측면 보다는 <정글>을 보며 떠올랐던 장면에 집중해본다.



| 미친 사자와 물고기와 자작나무 숲


무성한 잎이 얽힌 열대우림 속 원을 그리며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사람에서 동물로 서서히 변한다. 팔다리가 가녀린 홍학, 힘을 겨루는 맹수, 날아다니는 벌레까지. 황홀한 움직임이 원에서 중앙으로 향하며 끝없이 펼쳐진다.


몸은 성별을 막론하고 탄탄하며 굴곡지다. 근육의 긴장과 이완이 선명히 보인다. 속으로 절로 함성이 나온다. 반대로 얼굴은 그늘져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들이 더욱 문명 속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글> 속에서 많은 동물을 연상했지만, 그중에서도 내 머릿속을 오래 머물었던 것은 사자다. 나는 사지를 사용하여 걷고, 구르고, 기어 다니다 떨어지는 몸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화난 맹수 같은 근육의 움직임을 보며, 탄탄한 종아리의 작용을 보며 그 몸에 나를 투영했다.


‘아. 미친 사자가 되고 싶다.’


자유롭게 부르짖고 매달리고 몸을 내던질 수 있는 미친 사자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풍성한 갈퀴를 모조리 흔들고 나서 만족스럽게 먹이를 뜯는 것. 달빛이 내리는 초원 위에서 춤을 추고 밤하늘을 지붕 삼아 잠드는 것. 나는 눈치 보지 않는 사자의 자유로운 삶을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며 정글은 이동한다. 정글은 해가 중천에 떴다가 새카만 어둠이 되고, 물 밖에 있었다가 지하로 내려간다. 마치 분리된 대륙처럼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 같다. 지구상의 정글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도 했다. 화성에 정글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저 생물 또한 동물이 아니라 외계 생명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SF 영화와 같은 장면들을 떠올렸다.


외계 생명체든, 정글 속 짐승이든 자연은 흐른다. 멈추어 있는 것 같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흐르고 있다. 지각변동하는 땅처럼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정글>의 무대처럼, 몸들도 끝지점에서 시작점으로 돌아와 흐르고 있다. 머리와 발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몸의 흐름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정신 차려보면 사라져 있고, 정신 차려보면 올라와 있다. 그만큼 몸이 만드는 자연의 흐름, 곡선, 리듬은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우주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원부터, 자연의 소리, 서정적인 피아노 멜로디까지 정글이라는 타이틀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나는 클래식 공연에 온 것처럼 피아노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눈을 감기도 했다. <정글>의 음악 제작은 일본의 사운드 아티스트 ‘마리히코 하라’가 감독으로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공연의 백미는 물소리 이후부터라고 생각한다. 스크린에 모노톤 그러데이션 색상이 깔리자 무대는 물이 첨벙이는 공간으로 바뀐다. 조명이 무용수의 뒤를 비추고 이들은 까만 실루엣으로 존재한다. 남녀가 원을 그리며 둥글게 유영한다. 물고기처럼, 물방울처럼 호수에서 첨벙인다. 스크린의 빛이 마룻바닥을 비추며 반짝였다. 바닥에 이들의 그림자와 실루엣이 함께 보였다. 튀어오른 물고기가 물 표면에 반사되어 다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장면이 연상됐다. 나는 한참 동안 넋이 빠진 채로 눈동자에 이 순간을 담았다. 아름답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문명 속 나는 정글을 꿈꾼다


정글은 다시 숲으로 돌아온다. 양 옆으로 거대한 나무가 일렬로 늘어선 울창한 자작나무 숲이 떠올랐다. 사이사이 빛이 비치고 무용수는 두 사람끼리 뭉쳤다가 흩어진다. 무용수들은 셋, 넷으로 뭉쳐서 나와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인원이 나와 저 끝, 무대 뒤편으로 향한다. 무대 맨 앞에는 단 한 명의 무용수만이 엎드려있다. 그녀는 무리에서 떨어진 작은 사슴처럼 보였다.


정글 속 사람들은 저 멀리 나아가 그녀를 응시한다. 조명은 무대에서 관객석으로 확장되며, 그녀를 바라보는 인원이 몇 배로 늘어난다. 그녀는 이 공간 모든 이의 시선을 받고 있다. 생경한 감정과 동시에 측은지심을 느꼈다.


‘당신도 어서 무리에 들어가.‘


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 바람대로 천천히 움직여 저 먼 끝 정글의 사람들에게 향한다. 그녀가 무리로 들어가고 나자 시선을 두던 곳이 사라져 버린다.


아, 그들은 나를 보고 있다.


측은지심의 대상은 남이 아닌 바로 나였다. 그들은 나에게 연민의 시선을 던지는 것 같았다.


<정글>이 멀어지고 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세상. 자유롭게 몸부림치고, 뛰어노는 몸들이 살아 숨 쉬는 세상. 그 속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본다.


맞아. 난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어야 하지.


현실로 돌아온 나는 정글과의 이별을 부정하고 싶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간 내가 얼마나 야생의 자유와 날것의 감정을 꺼내길 원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더 솔직해질 수 있을까?


암전 동안 마음 속 정글의 깊이를 짚어보며, 숨겨둔 욕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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