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에 삼십으로 신월동에 가보니
동네 옥상 위로 온종일 끌려다니네
이것은 연탄창고 아닌가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만 같아요
평양냉면 먹고 싶네
- 씨 없는 수박 김대중 [300/30] 中에서 -
이런저런 웹드라마 일을 전전하던 나는 마침내 보증금 200만 원을 모으는 데에 성공했다. 웹드라마 스탭은 TV드라마나 영화 스탭보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게다가 막내라면 더욱이 그렇다. 2018년 당시 내가 받은 임금은 월급으로 150만 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먹을 거 덜 먹고, 옷도 싸구려만 사서 입으며 돈을 아낀 끝에 드디어 고시원을 벗어날 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보증금 200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많지 않았다. 보증금은 500만 원이 일반적이었고, 저렴하다 해도 300만 원이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고시원을 탈출하고 싶었기에 저렴한 보증금의 방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부동산 어플에서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짜리 반지하 원룸을 발견했다. 위치는 신월동이었다.
신월동을 가기 전까진 몰랐다. 저 노래 가사가 진짜일 줄은… 정말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만 같았다. 한 시간에 두세 번씩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건물 옥상을 스치듯이 날아갔다. 갑자기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졌다. 그래도 옥탑방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빨간 벽돌의 오래된 다세대 주택. 목소리 걸걸한 70대 집주인 할머니가 나를 반지하로 데려가 집을 소개했다. 원룸보다는 화장실과 부엌이 딸린 지하 창고에 가까웠다. 집 안엔 현관이 따로 없어서 현관문 앞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과 분리된 주방이 나왔다. 주방 오른편엔 한 계단 올라가서 들어가야 하는 욕실이 있었고 왼쪽 문으로 들어가면 방이 나왔다. 방에는 도로 방향으로 창이 나 있었고 창을 통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을 볼 수 있었다. 주방과 욕실, 방을 포함한 전체 크기가 5평이 조금 안 됐다. 옵션은 가스레인지와 에어컨이 끝이었다.
낡고 꾀죄죄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고시원에 비하면 굉장히 넓고 쾌적한 환경이 아닌가. 나만의 욕실과 주방이 있고 방에는 창문마저 있었다. 미약하지만 햇빛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당시 내게 굉장한 메리트였다. 바로 집주인 할머니와 계약을 했다.
처음 이사를 갔을 때 너무 행복했다. 욕실을 갈 때 샤워 바구니를 들고 가지 않아도 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방으로 와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매번 공용 샤워실에서 낑낑대며 옷을 입는 게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 정도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 만족스러웠다. 살만 했다. 바선생님이 찾아오기 전까진.
어느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데 부엌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뭔가 타닥타닥하고 움직이는 소리. 뭔가 싶어 부엌 불을 켰더니 바닥에 바퀴벌레가 있었다. 아닐 거야… 바퀴벌레일리가 없어… 바퀴벌레 같은 딱정벌레겠지.. 하지만 딱정벌레 치고는 너무 빨랐다.
고시원에서 몇 번 바퀴벌레와 마주쳤지만 대부분 크기가 작았고 방 안이 아니라 복도에 있었다. 방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바퀴벌레가 안으로 들어올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밖에서 들어온 게 아니라 이곳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재빨리 장판 밑으로 숨는 녀석을 추적해 숨통을 끊어놓았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퀴벌레들이 치약을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문지방에 치약을 발랐다. 말하자면 결계를 친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바퀴벌레는 간헐적으로 출몰했다.
진짜 문제는 여름에 발생했다. 지인의 단편영화 작업을 도와주러 고향에 한 달간 내려가야 했다. 방을 비운 사이 바퀴벌레들이 집을 점령할까 걱정이 되어 깔끔하게 청소를 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한 달 후. 함께 자취를 하기로 한 동생과 신월동 반지하 방으로 갔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는데… 부엌에서 7~8마리의 바퀴벌레들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사람이 찾아올 거란 생각을 미처 못했는지 바선생님들은 뒤늦게 부랴부랴 몸을 숨겼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들추니 거기에도 바퀴벌레가 있었다. 행거에 개어 놓았던 옷을 터니 거기서도 바퀴벌레가 나왔다. 패닉에 빠졌다.
차마 바선생님들과 동침을 할 수는 없어서 근처 찜질방을 갔다. 집이 있는데도 찜질방을 가야 한다니… 비참했다. 동생과 함께 바선생님들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여기저기 바퀴벌레를 박멸할 방법을 수소문했다. 지인이 맥스포스겔이라는 약을 추천해 줬다. 바로 약을 사서 반지하 이곳저곳에 놓고 며칠을 더 찜질방에서 지냈다. 그 후로 신기하게도 바퀴벌레는 나타나지 않았다.
바퀴벌레만 없으면 만사형통일 줄 알았건만 신월동의 반지하 생활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거의 10분마다 한 번씩 비행기 소음이 들렸다. 밤 10시 이후에는 국내선 비행기가 날아다니지 않으니 소리까진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하지만 공기가 너무 안 좋았다. 창문의 높이가 바깥 거리의 바닥 높이와 같아서 먼지가 많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내려다볼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나마 동생과 내가 남자라 다행이지. 만약 여자였다면 꽤나 불안했을 것 같다.
게다가 습도도 너무 높았다. 한 번은 촬영에 쓸 폭죽을 우리 집에 보관했는데 촬영 때 쓰려고 보니 불이 잘 붙지 않았다. 폭죽이 습기를 머금어 그런 거다. 창문 자체가 작다 보니 환기가 잘 되지 않았고 방의 절반 이상이 지하에 묻혀있는 형태이니 방이 항상 눅눅했다. 빨래가 잘 마르지 않아 항상 옷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점점 반지하 생활이 힘겨워졌다. 동생마저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같이 산지 2개월이 지나자 당연하다는 듯 월세를 안 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동생은 반지하 월세의 1/3과 공과금을 내기로 약속했다. 월세를 달라고 하자 돈이 없어서 못 준다고 뻔뻔하게 답했다. 생활비도 전부 내가 냈고, 동생이 세 달 동안 공과금을 내지 않아 전기와 가스가 끊길 뻔했다. 남 눈치 보지 않는 녀석의 성격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책임감이 없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한 푼이라도 월세를 아껴서 얼른 반지하를 탈출하려 했는데 오히려 입이 하나 늘어 생활비가 더 들었다. 어째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었다. 그저 슴슴한 평양냉면이나 먹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