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죠?
라는 질문이 항상 따라붙는다. 질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매번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퍽 귀찮다. 뭔가 대단한 포부나 사회를 향한 저항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안 가게 되었어요”
라고 답하기도 민망하다. 나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이
“와 대단하네요!” 나 “그거 정말 멋진데요!”
라는 말을 하면 어딘가로 숨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되뇐다. 숨을 순 없으니 그냥 뻔뻔하게 대단하고 멋진 척을 하자.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옷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파티에 갔다고 해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파티에 참석했다. 화려하고 독특한 자켓을 입은 사람도 있고, 우아한 원피스, 깔끔하지만 고급스러운 정장, 그냥 티셔츠, 저렴한 스파브랜드 심지어 지역 축제에서 나눠준 후줄근한 면티를 입고 온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중 웃통을 벗은 사람이 돌아다니며 칵테일을 홀짝이고 있다면 당신은 물어볼 수밖에 없다.
“왜죠?”
그리고 이 누디스트의 몸매가 그리 좋은 편도 아니라면 이유는 더 궁금해진다.
“도대체 왜죠?!”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옷을 입지 않은 것인가.. 궁금해하는데
“어쩌다 보니 안 입게 되었어요”
라고 답하면 당신은 그저
“그거 정말 멋진데요!”
민망하게 말할 수밖에. 몸매라도 좋으면 조금 이해는 간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맨몸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단순히 운동을 많이 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설사 몸매가 좋다 해도 부담스럽긴 매한가지다.
예전보다는 ‘왜’라는 질문을 덜 받는다. 새로 만나는 사람의 수가 줄어서도 그렇고 그동안 해온 일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라는 짧지만 강력한 질문은 지난 7년의 서울살이 동안 나를 따라다녔고 정말 왜 그런 건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왜 대학을 안 간 걸까? 혹은 못 간 걸까?
일단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 특히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중앙대학교 서양화과를 나왔다. 1980년대 후반 강원도 원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중앙대를 간 건 흡사 장원급제 비스무리하다. 당시엔 예술대학이 몇 없기도 했으니 중앙대의 위상은 지금보다 더 컸으리라. 그래서 아버지가 승승장구했느냐? 그렇지 않다. 그래도 좋은 대학을 나왔으니 학교 선생님도 했고, 학원을 열어 입시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진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아버지는 자신의 이상적인 마인드를 나와 동생에게 전파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좋은 대학이 아니면 갈 필요가 없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지방대를 가겠다는 소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좋은 곳이 아니면 대학을 안 가도 된다고 생각했고, 고3이 되자 실행에 옮겼다. 내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대학 두 군데의 영화과에 지원했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부모님은 당황했다. 내가 붙을 줄 알았나 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방대에 지원해 봤어도 좋았을 것 같다.
두 번째 이유는 지방이라는 환경과 나의 관심사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나는 친구들과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자연스레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영화 감독이 되려면 당연히 영화과에 가야 한다고 당시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학교 선생님 중 그 누구도 영화과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미술이나 음악 학과라면 그래도 정보가 있었고 준비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연기과까지도 얼추 보낸 사례가 있었다. 그런데 영화과?
그거 뭔데… 무서워..
선생님들은 대략 이런 반응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영화과를 가고자 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그래도 일단 야자와 방과 후 학습을 하는 게 좋을걸?”
이라는 별 영양가 없는 선생님의 조언에 나는 어떻게 입시를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글쓰기 시험을 본다는데 그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세상이 알아주겠지. 그래서 고등학교 3년 내내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내가 지원한 대학은 나를 알아주지 않았다. 알아줄 수가 없었다. 당연하다. 지원자는 많고 학생 정원은 정해져 있으니 개개인의 자질을 수치화해서 당락을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하고 싶은 일을 한 사람에게 어떤 가산점을 줄 수 있겠는가?
세 번째 이유는 가정형편이다. 첫 번째 이유와 연결이 된다. 흔히들 이상적인 마인드가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도가 있다. 현실에 발을 디딘 채 이상을 추구하는 마인드가 좋은 거지, 그저 이상적이기만 한 건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스스로 되고 싶은 이상향과 점점 멀어지는 자신의 모습에 아버지는 괴로워했다. 그래서 다른 일을 관두고 수제 가구를 제작하는 작가가 되려고 했다. 아버지의 수입이 없으니 엄마가 고생을 했고 우리 집은 항상 가난했다. 나와 동생, 할아버지(중학교 때까지 함께 살았다)까지 같이 사는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 엄마가 벌어들이는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엄마는 월급으로 200만 원 정도를 받았던 것 같다. 5인 가족의 생활비가 200만 원이라니 당연히 빚이 생겼다. 당시엔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에겐 본인도 알지 못하는 정신질환이 있었으니까(이 부분은 이후에 서술할 예정이다).
인터넷으로 영화과 입시 준비 방법에 대해 찾아보던 나는 영화과 입시를 도와주는 학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집의 경제 상황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었다. 어차피 학원 따위 못 가는 거 나의 재능으로 현실을 정면돌파하겠다! 포부는 원대했으나 이러한 상황을 돌파할만한 특출 난 재능이 내겐 없었다.
그래서 고졸이 되었다. 고졸로서의 삶이 어떠냐 묻는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
무진장 외롭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 나도 안다. 하지만 20대가 되자마자 세상을 홀로 살아간다면 무진장 외롭게 된다. 개구리들과 어울리는 올챙이의 느낌이라고 할까. 난 아직 개구리가 아닌데.. 그러면 주변의 개구리들이 위로해 준다. 얌마 쟤들도 결국 개구리가 되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 알겠는데 나도 올챙이라니까요? 이제는 뒷다리도 나오고 앞다리도 조금씩 나와 어린 개구리가 되었지만 올챙이 시절 나는 어두운 터널을 홀로 걷는 것처럼 외로이 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