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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네마진국 Jun 19. 2024

나의 첫 자취방 DMC

  DMC를 아는가? Detroit Metal City가 아니다. Digital Media City다. 상암동에 위치한 DMC 첨단산업센터가 내 서울살이의 첫 자취방이었다. 


  2017년 봄. 나는 말년휴가를 나와 제대 후 뭘 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영상미디어센터를 들렀다. 고등학교 때부터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촬영장비와 편집실을 쓰기 위해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다. 간만에 친한 직원 분들 얼굴이나 볼겸 찾아갔다가 고등학생 시절 단편영화 만들기 강의를 해주셨던 강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강사님은 내가 곧 제대한다는 소식을 듣더니 무언가를 제안했다. 


“너 독립영화 연출팀 해볼 생각 있니?”


  강사님의 지인이 연출을 하는 독립 영화라고 했다. 1년 9개월간 군대에 갇혀 있던 내게 그건 꽤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게다가 이건 진짜 영화가 아닌가. 나 혼자 촬영하고 편집하던 그런 단편 영화가 아니라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도 받고, 각 파트 별로 팀이 나눠져 있는 진짜 장편 영화! 


  나는 제대를 하자마자 까까머리에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서울로 면접을 보러갔다. 조감독님을 만나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다. 별건 없었다. 이전에 뭘 했는지 앞으로 뭘하고 싶은지 정도 물어봤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 조감독님이 물었다. 


“근데 어디서 지내려구요?”


  그러게. 어디서 지내지? 생각해보니 독립영화 일을 하는 3개월간 서울에서 지낼 곳이 없었다. 친척이나 부모님의 지인이 서울에 살지도 않았고, 가진 돈이라곤 군대 월급을 모은 60만 원이 전부였다. 지금이야 병사 월급이 잘 나오지만 당시만 해도 이등병 땐 13만원, 병장 땐 20만 원 정도를 받았다. 그것도 부대 내에서 생필품 사고, 휴가 나올 때 교통비와 식비로 쓰고, 겨울에 부모님 연탄 값이 부족하다해서 드리고, 전역 전에 후임들 배달음식 사주고 남은 돈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 맛있는 거 사주지 말걸…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서 지내는 것. 지금 생각하면 꽤나 무모했지만 그땐 낭만적으로 보였다. 영화를 향한 열정 하나로 올라온 강원도 청년! 그래서 사무실에서 지내겠다고 했더니 조감독님은 사뭇 놀라는 반응이었다. 내가 그녀였다면 나를 뽑지 않았을 거다. 이상하지 않은가. 서울에 집이 없어서 사무실에서 지내겠다고 하다니.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감독님은 나를 연출팀으로 뽑아주었다. 


  그렇게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DMC첨단산업센터의 한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한편으론 의아했다. 월급으로 150만 원을 준다고 들었다. 많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지원자 중에서 나보다 경력도 많고, 집도 서울인 사람이 없었을까? 왜 나를 뽑은 걸까? 역시! 열정의 승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사무실에서 생활한다는 건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았고 꽤 불편했다. 일단 씻는 게 문제였다. 미리 찾아보니 DMC첨단산업센터 지하에는 샤워실이 있었다. 거기서 씻으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출입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출입증은 어떻게 발급받는데요? 안내데스크에 물으니 첨단산업센터에 상주한 기업에 근무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재직증명서를 가져와야한단다. 그래서 PD님에게 재직증명서를 발급해달라고 했는데 그게 불가능했다. 우리 영화 스탭들이 사용 중인 사무실은 서울영상위원회의 소유였다. 서울영상위에서 우리 영화에 공간 지원을 해줬기 때문에 그 사무실을 쓸 수 있었다. 그러니 서울영상위원회에서 발급한 재직증명서가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서울영상위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영진위에서 지원한 독립영화에서 일하고 있었다. 감독님의 개인사업자로 재직증명서를 발급할 순 있었지만 그걸 DMC첨단산업센터에 제출하더라도 샤워실을 이용할 순 없었다. 젠장. 


  그래서 도둑 샤워를 했다. 샤워실 앞에서 청결에 깨나 신경 쓰는 노숙자처럼 서 있다가 자전거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샤워실로 들어가면 문이 닫히기 직전에 샤샥 재빠른 몸놀림으로 따라 들어갔다.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언제 샤워실에 오는지 파악해야 했고 오늘 아무도 샤워실을 쓰지 않으면 어쩌나 오지않는 자전거인들을 기다려야 했다. 샤워실에 들아간다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이상하지 않은가. 누군가 샤워실 앞에 서 있다가 당신이 들어가자마자 따라 들어오다니. 상상력이 풍부한 자전거인이라면 영화 싸이코의 샤워씬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억울했다. ‘저 여기서 일하는 사람 맞아요…’ 라고 겁먹은 자전거인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야 했다. 


  자는 것도 문제였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 그러니까 촬영 전엔 9to6 근무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9to6가 아니라 10to9이나 10to11이 되는 날이 허다했다. 프라이버시 따위 존재할 수가 없었다. 행여나 늦잠을 자게 되어 일찍 출근한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리고 나는 청일점이었다. 군대와 정반대로 여자만 있는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일하는 건 상관 없지만 생활하는 건 퍽 불편했다. 아마 그들도 나 때문에 불편했을 거다. 물리적으로도 편치는 않았다. 사무실 소파는 눕기엔 너무 물컹했고 나는 며칠 지나지 않아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게다가 무서웠다. 난 어려서부터 쫄보였다. 공포 영화? 절대 못 본다. 귀신이건 사람이건 다 무섭다. 텅 빈 사무실에 불을 끄고 누워있으면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잘 곳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


은근슬쩍 감독님이 제안했다. 나는 모두가 퇴근하면 감독님 방의 소파에서 잠을 잤다. 이게 좀 불편했나보다. 자기가 월세 내줄 것도 아니면서.. 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하는 수 없이 감독님과 함께 보증금이 없는 월세방을 알아보러 다녔다. 가격은 대부분 40만 원정도였고, 30만 원대의 방들은 대부분 더럽고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풍겼다. 일본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그런 방 있지 않은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닌지라 어디라도 들어가서 지내고 싶었지만 방의 컨디션과 상관없이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보증금이 없는 단기방들은 머무는 기간의 임차료를 일시납부해야 했다. 30만 원짜리 방에서 세 달을 지내려면 90만 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 전 재산은 60만 원이었다. 두 달을 지낼 수 있는 돈이지만 전 재산을 모두 월세로 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일한지 3주 정도 지났을 무렵 다행히 촬영 일정이 한 달정도 미뤄졌다. 나는 고향 원주로 내려와서 조감독님이 지시한 업무를 재택근무로 처리했다. 


  그리고 70만 원 가량이 입금됐다. 영화, 드라마의 연출팀이나 제작팀으로 일을 하면 총 급여의 절반을 중간에 받는 경우가 있다. 나머지 절반은 일이 끝나는 시점에 받게 되고. 그러니까 70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건 이 금액이 내가 받을 총 급여의 절반이라는 뜻이다. 내가 받기로 한 금액 150만 원은 월급이 아니라 삼 개월 간 받는 총 급여였다. 월급으로 따지면 한 달에 50만 원을 받은 셈이다. 순간 내가 타임워프를 한 건가 싶어 달력을 봤다. 2017년이었다. TV를 틀어봐도, 밖에 나가 봐도,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지금이 1980년대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내가 고용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내 열정의 가격은 그만큼 저렴했다. 사자성어로 ‘열정페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왜 임금에 대해 정확히 얘기해주지 않았냐고 따질 수 없었다. 결코 합당하다고 볼 순 없지만 그런 꼼수가 이해는 됐다. 독립영화에게 주어지는 제작지원금은 항상 턱없이 부족하니까.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땐 총 제작지원금의 50% 이하만 스탭과 배우들에게 임금으로 지급할 수 있었다. 촬영팀이나 배우의 페이를 깎을 순 없었을테니 연출팀의 페이가 이렇게 형편없이 깎이게 된 것이다. 


  150만 원이 월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나는 마음 놓고 일했다. 어휴 부담 가질 뻔했네. 안도하며 실수하면 어쩌나 사고치면 어쩌나 걱정을 내려놓고 첫 영화 현장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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