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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Mar 05. 2024

240305 세 번째 결혼기념일을 혼자 보냈다.

오랫동안 이날을 떠올리며 살 것 같다.

지난 2월 27일은 세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기념일을 앞두고 무얼할까 고민이 많았다. 여행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기념일부터 연차를 쓰면 삼일절과 주말까지,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니까. 일본에 갈까,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삼일절에 일본 가는 건 별로라고 서로 이야기했다.(다행히도 이럴 땐 의견이 잘 맞는 편이다.) 그럼 지방으로 다녀오지 뭐, 했는데 아뿔싸.. 삼일절에 지인 결혼식이 있는 걸 까먹었다.


결국 여행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결혼기념일 당일은 평일이어서 출근했다. 우리 회사는 결혼기념일 반차 휴가를 주는데 남편 회사엔 그런 게 없다. 그래서 점심부터 혼자 시간을 보냈다. 뭐 할지 고민하다 전시회 버스 광고를 본 게 기억나 예술의 전당에 갔다. 초행길이라 긴장되면서도 설렜다. 도착하자마자 배가 고파 카페에 갔다. 평일 낮인데도 사람이 엄청 많았다. 아이와 함께 온 부모님, 어르신들이 많았다. 한 켠에 자리 잡고 커피와 빵을 먹었다. 혼자 카페에 온 게 오랜만의 일도 아닌데 모든 게 낯설었다. 커피숍의 풍경, 그곳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대화 소리까지. 거기 있는 사람들은 그곳에 익숙해 보였는데, 나만 낯설어해서 마치 여행하는 이방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페를 나와 미술관에 갔다. 광고에서 보았던 미셸 들라크루아 작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그 광고 속 그림이 예뻐서 직접 보고 싶었다. 프랑스 작가인데, 1930년대 파리의 다양한 계절, 밤과 낮, 일상을 따스하고 귀여운 그림체로 표현했다. 파리를 가본 적도, 가보고 싶던 적도 없지만 그림을 보고 있자니 지금 이곳이 파리 같았다.


전시를 보고 난 뒤 굿즈샵에 갔다. 맘에 드는 그림이 몇몇 있어서 엽서라도 구입하고 싶었다. 그중 웨딩 모습이 담겨있던 작품의 엽서는 남편에게 쓰려고 골랐다. 또 커피숍에 가서 엽서를 썼다. 엽서를 쓰니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작년 결혼기념일 다음 날, 남편을 두고 홀로 이탈리아로 떠났다. 관광지를 다녀오면 꼭 엽서를 샀고, 가족과 지인에게 엽서를 썼다. 그때, 나는 종종 외로웠고 얼마간 우울했다. 외롭고 우울했다니... 이 워딩이, 이 감정이 낯설다. 입으로 뱉어본 지 오래된 단어, 느껴본 지 오래된 감각의 단어 같았다.


저녁쯤 남편 회사로 가 남편을 픽업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예약해 둔 식당에 갔다. 모처럼 분위기를 냈다. 영화 예약도 해두었다고 해서 극장에 갔다. 재개봉한 영화였다. 나는 이미 봤던 영화인데, 남편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미 알고 있고 뻔한 내용인데도 나는 또 울고, 끝난 뒤엔 영화 얘기를 하며 "그러니까 나한테 잘하란 말야!" 라며 괜히 남편한테 핀잔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호수를 함께 걸었다.


세 번째 결혼기념일을 보내며 내가 참 잘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가끔 낯선 일상을 통해 여행하는 기분을 내고, 몇 시간 남짓이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좀 더 잘 보내줄 아는 인간이 된 것 같아 내가 기특하다. 또, 해를 거듭할수록 남편과의 시간이 편하고 즐거워져서 다행이다. 외로움과 우울감이 불현듯 또 찾아오겠지만 지금은 그 감정이 낯설고 두렵지 않다. 이미 나는 그런 시간을 잘 지나온 사람이니까.


좋은 결혼기념일이었다. 오랫동안 이날을 떠올리며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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