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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Mar 09. 2024

240308_운

작은 불운은 더 큰 불운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모든 게 완벽했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철이 왔고, 신호 대기 없이 길을 건넜다. 재희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작은 일도 행운의 시그널로 받아들이는 사람. 퇴근 후 지민과 만나기로 해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취업 후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만날 때면 늘 편안함을 느꼈고, 서로 결이 참 잘 맞아서 이런 친구가 있는 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 여겼다.


외근 후 바로 퇴근해도 된다는 팀장의 말에 재희는 지민의 회사로 갔다. 지민을 놀라게 해 줄 생각에 말도 없이. 가던 중 지민에게서 문자가 왔다.


"재햐, 나 오늘 야근할 거 같아 ㅠㅠㅠ 아무래도 전시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듯 ㅠㅠ 미안"


"갠춘. 야야, 일이 먼저지 뭐 별 수 있냐."


지민은 작은 디자인 회사에서 일했다. 클라이언트가 지랄맞아서 피드백이 항상 늦고, 수정이 많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그냥 집에 갈까, 고민하다 얼굴이나 보고 가야지 싶어 지민의 회사 앞까지 왔다. 근처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어 길이 익숙했다. 회사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5층이 자기네 회사라고 지민이 알려 주었다.


고개를 들어 층수를 헤아렸다.

1층 2층 3층 4층 5층.

다시 세었다. 1층 2층 3층 4층 5층. 분명 5층이라고 했는데, 불이 다 꺼져 있었다.


지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회사야?"


"웅웅, 회의 중ㅠㅠㅠ 끝날 기미가 안 보여."


재희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갔다. 자기 전 인스타그램을 보는데 지민이 남자 친구를 태그해 올린 데이트 사진을 보았다.


- 오늘 데이트했구만. 그냥 말하지, 뭐하러 야근 뻥을 쳤대. 귀여운 놈.


다음 날 지민의 귀여운 거짓말을 놀리려 인스타그램에 다시 들어갔는데 게시물이 사라졌다.


이 일이 다시 생각난 건 지민을 만났을 때다. 전시회를 못 간 게 너무 아쉽다며 지민이 그날 일을 다시 꺼냈다. 클라이언트가 항상 이런 식으로 퇴근 직전에 피드백을 준다며 성토했다.


재희는 지민의 맑은 눈을 좋아했다. 영화 슈렉 속의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눈이 크고 맑아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눈이었다. 또 지민은 말을 정말 예쁘게 하는 아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 지민의 맑은 눈과 다정한 말투에 푹 빠져버렸다고, 재희는 종종 말했다.


그런 지민의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한 건 지민인데, 왜 재희가 눈을 피하는 걸까. 대화하는 내내 재희는 시선을 둘 곳이 찾아 눈을 굴렸다.


작은 것에서 행운이 시작되듯 불운도 마찬가지라는 걸 재희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작은 행운이 큰 행운을 불러오지는 않지만, 작은 불운은 더 큰 불운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재희는 억울했다. 거짓말을 한 건 지민인데, 괴로운 건 재희라는 사실이. 지민은 여전히 맑은 눈으로 다정하게 재희를 대했다. 그럴수록 재희는 지민과의 시간이 힘들었다. 만날 때면 눈을 맞추기 어려웠고, 지민의 모든 이야기를 의심했다. 그날 거짓말을 알아챘을 때, 거짓말 말라고 해야 했을까. 회사 앞이라고 잠깐 내려오라고 말해야 했을까. 그랬다면 내 마음이 편했을까. 지민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 데이트하러 간다고 하면 재희가 지민을 미워할까, 그랬을까. 원래 지민은 거짓말을 잘하는 아이였는데, 여태 몰랐던 걸까.


세상은 원래 그런 걸까. 무슨 일이든 속이는 사람보다 속은 사람이 괴롭다. 속은 사람이 억울하다고 말하면 바보처럼 왜 속냐며, 그때 물어 따지고 알아봤어야 한다는 냉소만 돌아오니까. 오래도록 그 일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는 쪽은 늘 속은 사람이니까. 재희는 오래도록 그 일을 곱씹었다.


재희가 퇴근 준비를 하는데, 문자가 왔다. 지민이었다.


"오늘 뭐 해? 오뎅탕에 소주 한 잔 어떠셔?"


" 아이고ㅠㅠ 진작 말하지. 나 좀 전에 약속을 잡아 버렸어. 다음에 먹자 ㅠㅠ아숩"


아무 표정 없이 답장을 보내고 회사를 나섰다. 지하철이 바로 왔고, 웬일인지 빈자리가 있어 앉을 수 있었다. 신호 대기 없이 길을 건너 집에 돌아왔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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