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떠나고 싶어 하는 건 언제나 나였는데.
출근하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주 촬영 때문에 정신이 없어 건성으로 끝낸 엄마와의 통화가 마음에 걸렸다. 그때 엄마는 농사지은 양파를 보냈다며 보관 법을 장황하게 설명하고는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는 길이라는 말을 흘리듯이 가볍게 말했다. 그리고 며칠 전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연결이 안 되어 계속 마음이 쓰였다.
하혈을 하고 난청 진단을 받았으며 눈앞에 자꾸 날파리 같은 것이 아른 거린다고 했다. 나이를 드니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엄마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서울로 올라와 제대로 진단을 받아보자고 권했는데, 여의치 않다며 엄마를 위해 기도나 많이 해달라고 답했다.
통화를 끝내고 친구이자 동료인 P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다 울어 버렸다. 가까이에 엄마가 있다면 좋을 텐데 멀리 있는 게 속상하고 엄마가 걱정되었다. 차에 홀로 앉아 집으로 가는 퇴근길, 엄마를 생각하며 또 울었다. 그제야 엄마가 나를 떠났다는 게 실감 났다.
엄마를 떠나고 싶어 하는 건 언제나 나였다. 엄마의 그늘이 싫었다. 엄마의 기대와 바람이, 엄마의 잔소리와 염려가 나를 옥죄는 것 같았다. 대학 진학을 핑계로 겨우 엄마의 곁을 떠났는데, 엄마는 기어코 나의 곁으로 다시 왔다. 동생이 군대를 가자 부산을 떠나 나와 가까운 곳으로 왔던 것이다. 다시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또 엄마의 그늘을 매일 체감했고 독립을 강행했다. 통보하듯 독립을 말했을 때 엄마는 당황해했지만 말리지 않았다. 대신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를 사주며 내 생활의 기번을 마련하는 데에 마음을 썼다. 나는 또 그렇게 엄마의 곁을 먼저 떠났다.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엄마가 있어 나는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나의 독립생활을 즐겼다.
단 한 번도 먼저 나를 떠난 적이 없는 엄마가 떠나버린 건 내가 결혼을 하고 난 뒤의 일이다. 결혼한 다음 해, 엄마는 먼 섬으로 떠났다. 엄마는 평생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떠도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인 걸까, 이 정도로만 엄마의 인생을 생각했다. 내 곁에 머물기 위해 평생을 떠돌았다는 사실을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다.
엄마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곳을, 그리고 내 곁을 떠난 것 같다.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끝냈다는 듯이, 그래서 더 이상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듯이. 엄마가 나를 떠났다는 걸 이제야 자각하고,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당황스럽고 외롭다. 내가 떠날 때마다 엄마의 마음도 그랬을까. 그토록 싫었던 엄마의 그늘이 이제는 한 뼘도 없는 것 같다. 엄마의 그늘이 구속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버팀목이고 사랑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언젠가 동료 S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의 부모님도 멀리 계셨는데, 부모님 생전에 우리가 부모님을 만날 수 있는 횟수를 생각해 보면 몇 번 되지 않는다고 그러니 부지런히 찾아봬야 한다고. 그 말이 꽤 충격적이었다. 보통은 부모님 연세를 생각하며 부모님과의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니까.
카페에서 이 글을 쓰는데, 자꾸 눈물이 나서 괴롭다. 엄마를 만나러 가야겠다. 이제는 내가 엄마의 그늘이 되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