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은 다 거기 있었다, 그의 즉흥성에.
낮잠을 자고 일어난 토요일 오후. 뭐 하며 놀까, 남편의 물음에 성수동 가자고 했다. 날도 흐리고, 네시가 넘은 시각이라 멀리 가기엔 부담스러웠다. 그러자 남편이 강릉은 어떠냐고 물었다. 밤바다를 보러 가자는 것. 남편의 답은 늘 예상을 벗어난다. 나의 난색을 느꼈는지 샤워를 하고 나온 남편이 말했다. 춘천 가서 닭갈비 먹고 올까? 남편답다. 그냥 바다를 보기로 하고 차에 몸을 실었다. 날씨를 확인한 남편이 이런 날엔 에버랜드에 가야 여유롭고 신나게 놀 수 있다고 말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편의 말에 웃음이 났다. 머쓱했는지 자기만큼 즉흥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혼잣말을 하더라.
답을 하자면 없다.
남편만큼 즉흥적인 사람을 나는 여태 만나본 적이 없다. 남편은 이런 식이다. 초복에 보양식을 만들어주겠다더니 재료 하나가 유통기한이 지났다며 외식을 제안했는데, 거기까지는 오케이. 어떤 메뉴도 정하지 않고 나왔지만 초복인만큼 보양 메뉴를 생각했는데, 우리는 그날 우동을 먹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으니까. 우동을 먹으면서 남편이 말했다. 이런 우동을 먹으면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다고. 하마터면 연차를 쓰고 어디 갈 뻔했다. 내일은 돈까스 덮밥을 해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집에 돌아오면 인스타그램에서 봤다며 치즈 감자전을 내놓는 사람이 내 남편이다. 어느 저녁엔 함께 백종원 아저씨 유튜브를 보는데, 파개장에 꽂힌 그가 당장 재료를 사겠다고 나서더라. 음식뿐만이 아니다. 여행지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차 안, 고단할 법도 한데 저기 신기해 보인다고 한 번 들어가 보자고 전쟁 기념관 같은 곳에 데려갔던 사람이다.
결혼 후 그가 원래 이렇게 즉흥적인 사람이었나, 미처 몰랐던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연애 때 날씨가 죽인다며 드라이브 가자고 불쑥 찾아오고, 제주에서 돌아올 일정을 미루고 미루다 보름 넘게 머물고,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이대로는 아쉽다고 하루 더 묵자며 텐트를 펼치던 사람.. 바로 지금 내 남편이 된 그 사람이다. 그는 결혼 후에도 그 모습을 일관되게 유지 중이다. 회사 일로 괴로워할 때 핸드폰 끄고 떠나자는 그의 제안이 기억난다. 숲 속의 조용한 북카페에서 나는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던가. 빠르게 지나가는 주말을 아쉬워하는 나를 데리고 갔던 그 카페는 또 얼마나 좋았나. 맛있는 소금빵과 커피 한 잔에 주말이 아직 여기 있음을 느꼈던 시간들. 얼마 전 엄마 생각에 꺼이꺼이 울던 밤, 그는 운전대를 잡고 하염없이 달렸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밤, 내 울음소리가 빗소리에 묻힐 수 있도록.
낭만은 다 거기 있었다, 그의 즉흥성에. 마주할 때마다 나는 당황하고 어이없어했는데, 기억에 남는 우리의 에피소드는 다 그의 즉흥으로 생겨났다. 그렇다면 그의 즉흥을 좀 더 즐겨봐도 괬찮겠다 싶더라. 그래서 어제 우리는 강릉에 가기로 했지만 양양에서 밤바다를 봤고, 그리고는 속초에 갔다. 시장에서 튀김을 사서 어느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맥주 한 잔 했다.(물론 맥주는 나만). 이것 또한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낭만적이었다. 이쯤에서 외치고 싶다. 그래, 우리가 계획이 없지 낭만이 없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