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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민아 Aug 04. 2018

모범 잔디정원

서울에서의 잡다한 일상을 뒤로하고 제주도 작은 토담집에 머문 지 닷새가 되었다.    

 

넓은 마당을 가진 이곳 주택들은 대부분 잔디를 잘 가꾸어 경관이 아름답다. 그다지 크지 않은 우리 집 정원에도 금잔디를 심어 단장해 놓고는 애써 꾸민 잔디밭을 푸르게 지키려고 가끔 이곳에 내려와 잔디 상태를 살피곤 한다. 협소한 정원이지만 철 따라 잡풀이 많이 자라서 올 때마다 풀을 뽑아야 한다. 


오늘도 아침부터 서두르는 남편을 따라 마당으로 나와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언뜻 보기에는 잔디만 곱게 자라고 있는 듯했으나 잔디 잎 밑에는 많은 잡초 군이 숨어 살고 있다.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여러 종류의 풀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고, 이름 모를 예쁜 야생 꽃도 은은한 향기를 전한다.


잔디 사이에 잠입해 슬그머니 뿌리내린 덩굴 식물은 유령처럼 팔을 뻗으며 어느새 틈바귀를 헤집고 나왔다. 주변을 살피면서 더듬어 가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풀 매러 밖으로 나가는 나에게 “잡풀은 억세니 뿌리까지 캐내야 해.”라고  한 남편의 당부를 실천에 옮기려고 호미까지 들고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화창한 어느 봄날 언니들을 따라 바구니 챙겨 들고 봄나물 캐러 들판을 누비고 다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렴풋이 다가온다. 고향 집 근처 텃밭을 뒤지며 채 해빙이 되지 않은 단단한 땅에 주저앉아 호미로 흙을 파헤쳐 달래와 냉이를 캐내던 그리운 시절, 그 아련한 옛 추억을 잠시 충전해준 고마운 호밋자루를 힘껏 잡아본다. 


이제 봄나물이 아닌 잔디 속에 숨죽이고 사는 어린 풀들을 잡아내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잔디를 괴롭힌 죄목으로 잡풀을 처벌하는 순간이다. 비정한 마음새를 추스르면서 날카로운 호미 끝을 땅에 대고 폼을 잡고 있는데 시선 안에 한 포기 잡초가 들어왔다. 잠시 손이 멈칫한다. ‘어찌할까, 이 생명을 그대로 봐 줄까? 식물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는 지각 능력이 있어 감정 신호에 반응을 보인다는데….’ 잠시 고심하면서 망설이고 있는데 옆에서 남편이 “얼른 뽑아버려.” 하고 다그친다. ‘그래, 같은 생명이지만 잔디를 살리기 위해서는 네가 희생되어야 해.’ 하면서 눈을 질끈 감고 힘껏 잡아당겼다.


땅 옆으로만 길게 뻗어가는 잔디 뿌리는 자생력이 강해서 짧은 시간에도 지표면을 빽빽하게 덮어 보기 좋은 초록색 밭을 만들어 준다. 잔디만의 아성을 지키기 위해서일까, 자기네들의 영역에서 다른 모습을 한 야생풀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독선이 있다.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자리를 고수하려고 어쩌다 끼어든 토끼풀, 민들레, 엉겅퀴, 쑥같이 사람에게 사랑받는 식물도 여지없이 배척한다. 그 배후에는 그들만을 돌보고 살펴주는 미더운 사람의 손이 있기 때문이다. 악명 높은 이름으로 누명을 씌워 잡초다 악풀이다 하면서 사정없이 뽑아버린다. 더 심하게는 독한 약을 뿌려서 다른 풀들이 설 자리가 없게 모두 제거하고 오직 잔디만을 보호해준다. 인류는 이미 식물에 지배되어 수만 년 이상 잡초와 공존해왔는데, 잡초는 천한 풀이고 잔디만 고귀한 풀이란 말인가.


가녀린 야생화가 고운 미소를 짓고, 실바람 따라 하늘하늘 나부끼는 풀잎 위로 벌 나비가 설핏 쉬어가는 그런 자유로운 풀밭이 아니다. 잔디가 몇 센티만 더 자라도 키가 너무 컸다 하면서 잔디 깎는 기계로 싹싹 밀어버리기 때문에 길이도 모양도 똑같이 밋밋하고 푸르스름한 밭이 평평하게 퍼져 있을 뿐이다. 매양 같은 땅을 공유하고 함께 뿌리내리며 살고 있는 동질의 생명체인데 지나치게 차별대우가 심하다. 인간은 식물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는데, 비좁은 틈새에서 비비대며 간신히 태어나도 외면당하는 잡초라는 이름의 생명들이 그지없이 애처롭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길가 풀숲에서도 각양각색 식물들이 독특한 제 모습을 자랑하며 함께 살아간다. 우리 지구 상에서 다양한 민족을 품고 살아가는 수많은 국가를 생각해 본다. 그 나라 안의 구성원이 비록 생김새가 같지 않고 이념이 다르다 하나 어차피 그들 모두는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어우르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다민족과 다문화가 형성되어 공동체로서 함께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풀의 세계에서도 생명의 근본적인 자유는 함부로 저지해서도, 견제해서도 안 된다는 의견이다. 그들 본성 그대로 살게 해주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섭리이기 때문이다. 우리 지구 표면에는 그 근원지가 어디이든 간에 수억만 피조물들이 함께 공존하고 회생을 되풀이하면서 지금도 생명의 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잔디 보호에 앞장서며 그 방면의 식견을 알량하게 내세우는 남편은 잔디밭 전문 디자이너가 되어 있는 듯하다. 오직 잔디 키 높이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며 조금만 자랐다 싶으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고 까까머리로 만든다. 그분의 지론에 따라 정성스럽게 가꾸는 우리 작은 잔디 풀밭은 수직 수평 원칙을 준수하는 모범 정원이 되어 있다. 거부도 동의도 못 하는 잔디밭은 말끔히 세수한 얼굴처럼 파리한 민낯으로 맹숭하게 누워 있을 뿐이다. 그렇게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정리해 놓고는 큰 보람을 느끼는 듯 남편은 희색만면하여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잔디는 정교하게 깎아주어야 잔디 본연의 모양을 갖추게 되는 것이야.”라고 주장하지만, 자연계에서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생존권은 자유롭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애정 어린 생각이다. 


제주의 작은 집 잔디 정원은 계절마다 가끔씩 찾아오는 주인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며 토닥이는 언쟁으로 시끄럽다고 투정하지 않을까 싶다. 지나가는 산들바람을 타고 잔잔하게 물결치는 풀밭의 즐거운 유희,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어 나는 항상 안타까워한다.


내 고향 집 앞 싱그러운 푸른 풀밭이 더욱 그립다. 





                                                                          * 이 글은 제 에세이집 '소심 소심 소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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