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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민아 Jan 02. 2019

화폭에 담은 무지갯빛

“엄마는 헛수고했네.”     


딸의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들은 엄마는 놀리던 손을 멈춘다.

그동안 딸을 위해 기울였던 정성이 모두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미적 감각이 남달랐던 딸이 화가의 길을 걷기 바랐다. 엄마의 꾸준한 관심과 독려로 자연스럽게 미대 지망생이 된 딸아이는 그림 공부에 몰두했다. 꽃, 과일, 장난감, 책 등, 책상 위에 놓인 다양한 색의 정물을 앞에 두고 열심히 그림 연습을 하는 딸을 보며 대견해하면서도, 앞으로 딸의 장래를 위해 과연 무엇을 더 해주어야 할지 고뇌했다. 모든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침묵으로 기도하듯이, 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하든 어미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고자 했다. 우선은 사물에 반사된 빛이 만들어내는 색채의 신비를 알게 해 주고 싶었다.      


태양은 우리에게 일곱 가지 찬란한 무지개색을 선물했다. 내면의 원초적 욕구와 열정을 자극하는 빨강, 따뜻한 온기로 풍요를 주는 환희의 빛 주홍, 부드럽게 마음 가득 안겨 오는 평화의 색 노랑, 심신을 차분하게 보듬어 휴식을 주는 초록, 시원한 해방감으로 꿈과 희망을 키우는 파랑, 마음을 진정시키며 정직함이 감도는 남색, 신비함으로 심리의 균형을 회복해주는 치유의 색 보라. 이 모든 색은 긍정의 힘과 함께 생명을 일깨우는 고유의 에너지를 가득 품고 있다. 


사물의 색에 깃든 에너지가 눈으로 전달되면 우리의 의식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과 사물 간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19세기 회화의 선구자 폴 세잔은 늘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사물의 색감 차이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색채로 감지된 의식을 미적 에너지로 형상화하여 밖으로 표출하는 작업이 바로 미술이 아닌가 싶다. 만물의 흐름과 함께한 천연의 색채가 작가의 손을 빌려 재탄생하기에 우리는 수많은 위대한 미술 작품을 통해 감동을 체험하는 것이다.


엄마는 한창 입시 미술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딸도 정물에 담겨있는 색채를 자기만의 이미지로 표현해 주기를 기대했다. 유화이든 수채화이든, 추상화이든 사실화이든, 마음껏 색을 조합하고 자유로운 기법으로 변화를 시도하며 스스로 그림과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어느 날, 엄마는 수건 가게에 들러 일곱 개의 수건을 사 가지고 왔다. 각각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가지 무지개색 수건이었다. 딸아이가 이 수건들로 얼굴을 닦을 때 그 색상을 보고 새로운 영감을 받아 그림과의 교감이 한껏 고취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매일 다른 색의 수건을 쓰면서 무지갯빛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게 되기를 소망하며 하나씩 정성스럽게 손수 빨아 빨랫줄에 널어놓고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옷가지를 빨아 널 때도 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각각 서로 대비되는 색채 별로 걸어 놓곤 했었다.


 엄마는 햇빛에 바싹 마른 수건들을 차곡차곡 개어서 화장실 선반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파랑 수건으로, 내일은 노랑 수건으로, 모레는 주홍 수건을 꺼내서 얼굴을 닦겠지. 그 순간 반짝 영감이 떠올라 위대한 명작이 나올 수도 있어. 이 일곱 색깔의 수건은 내 딸이 미술대학에 입학하는 데 큰 공헌을 해줄 거야. 하며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집에서 사용하는 여러 집기도 고운 빛깔이 물든 물품을 골라 새로 장만하면서 딸의 눈에 들기를 바랐다. 일곱 색의 파장이 영묘한 감응을 불어넣어 멋진 그림이 탄생하기를 기도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는 충격이었다. 지금껏 매일 선반에 놓인 수건을 꺼내 썼지만 단 한 번도 색채를 느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무표정하게 ‘엄마가 헛수고했다’는 말을 내뱉는 딸을 보며 사지에 온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공연히 부질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에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했던가, 실의에 차 고개 숙인 엄마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딸이 명문대학의 회화과 합격 통지서를 들고 엄마의 품으로 달려온 것이다. 모녀는 서로 얼싸안고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하늘가에서 따다 준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갯빛이 딸의 그림 위에 곱게 물들어 일곱 색이 수놓아졌다. 그 작품은 곧 세상의 어둠과 절망을 덮어주는 맑은 바람인, 그리고 세상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어머니의 작품이기도 했다.      

  

세상 모든 빛을 머금은 딸의 그림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되어 모두의 눈에 밝게 빛났다. 세상에 홀로 첫발을 딛는 과정에서 가장 큰 선물 받았으니 이제 딸의 새로운 인생은 무지갯빛과 함께 활기차게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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