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코로나라는 전지구적 전염병을 겪은 세대로서, 확실하게 배우고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전염병이
몸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얼마나 지각력을 갖고 사느냐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
지난 몇 년 간 다른 시대라면 어떤 선택이 생사를 가를 만큼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염병 시대에는 나의 어떤 생각과 판단이 나와 내 가족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알베르 까뮈는 <이방인>의 작가로 기억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 <페스트>를 더 기억한다. 실존주의 즉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드러내는 그의 철학이 집단 전염병이라는 재난 속에서 어떻게 발휘되는지
냉철하면서도 인간적인 글쓰기로 잘 보여주었던 것.
고전이 아니라면 어떤 현대적 글쓰기로도 보여주지 못한 깊이를 그는 작품 속에서 잘 보여준다. 대재난이
덮친 폐쇄된 도시의 끔찍한 상황에서라도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두 가지 해답을 그처럼 성실하게 알려준 작가는 오직 그뿐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전염병이 끝난 후 다시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똑같은 문제를 또다시 겪게 된 다는 것을 까뮈는 짚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페스트의 시대는 코로나의 시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지만, 시원한 해결이란 역시 없었다. 페스트나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는 동물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사람을 통해 전염되기 때문에 사람들 각각의 존재적인 특성과 떼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병은 겪어보면 명확하게 알게 된다. 병에 걸리기 전에 우리는 사전 정보도 듣고 예방책도 듣지만 그것 자체가
일종의 추상이다. 그러나 일단 걸리면 우리는 확실하게 안다. 이 병의 실체를. 무엇이 나를 제일 고통스럽게
하고 무엇이 나를 아쉬움의 경지로 가게 하는 지를. 우리는 우리의 본능 대로 평범한 날 가운데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친구를 만나고 웃고 떠들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만, 병은 본능과 역행한다. 대신 사고를 하게 만든다. 대체 나는 이런 병에 왜 걸렸을까? 무엇을 잘 못 했을까? 답이 나올 때까지. 그 해답을 얻을 때까지 내 습관을 고칠 때까지, 지독한 약을 다 먹고 치료를 다 할 때까지 병은 내 몸 안에서 나와 함께 존재한다.
평소 면역 관리의 중요성 같은 답도 존재하지만 나는 사실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답은 없다고 본다. 어차피 사람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존재니까. 규칙적으로 60년을 재미없이 사는 것. 규칙 없이 59년 11개월을 사는 것. 본인의 선택은 언제나 자신 내부에서 나오니까. 하지만 사람은 여타의 다른 동물과 달리 자기 스스로를 자기 운명을 바꿀 수도 았었다는 사실에 한없는 슬픔으로 자기를 끌고 들어간다. 그로 인해 생기는 가장 큰 비극은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주인임에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내 인생은 이 지구와 어긋난 상태로 존재하다가, 피할 수 없는 결론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의 가치 있는 판단의 소중함은 '병'이라는 상황아래 가장 명확하게 드러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 인생의 목적이 도착 지점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에 좀 더 눈길을 두고 자기 자신과 타인의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고 잘 행동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각종 매체에서는 몇 년 전과 마찬가지로 재유행에 대한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실제 상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올 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이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정부? 언론 매체? 세계보건기구?
나는 결국 세 가지 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받아들일 것은 재유행될 것이라는 말 그 자체보다 확진자 수와 추이에 대한 수치적인 판단이다. 이 수치를 보고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할 능력을 갖추되, 흔들리지는 말자. 단순한 감기라는 말도 믿지 말자. 우리는 이미 겪어봐서 보고 배웠다. 이 병의 실체를. 본인이 아는
그 자체를 그냥 인지하면 된다. 그리고 일반적인 방역지침. 아프면 쉬고. 마스크를 쓰고. 사람 많은 곳을 피하고. 손 발을 씻는 수준에서 지키고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다. 본인이 판단하기에 증상이 심하면 병원에 가서 돈을 주고 검사하면 된다.
예전과 달리 강제적인 격리의무나 방역지침은 사라졌지만, 각자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과 해야 할 것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코로나 시대를 겪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다. 이 전염병이 확진자를 격리하고, 전국 학생을 다 온라인 수업을 시켜도 결국 모든 이가 변이에 대한 면역을 갖추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막연한 두려움이 이 모든 고통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떤 병은 가라앉고 다스리며 살 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애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좀 다른 예이지만 나는 <페스트>에 나온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타루라는 청년을 기억한다. 타루는 차장 검사인 법조인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엘리트 집안 출신이었다. 타루는 아버지와 어릴 때 기차 출발 예정시간과 도착시간을 외우는 평범한 게임을 하면서 놀았는데, 그에게 검사인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면 그저 평범한 가장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하는 재판을 구경하러 오라고 하는데 그는 거기서 집안에 있을 때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보고 만다. 한 방울의 눈물도 없이 냉엄하게 사형 선고를 말하는 아버지를 보고 난 뒤 타루는 그때부터 아버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아버지가 처음에 법정에 초대했을 때, 아마도 아버지는 법조인 아들을 기대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작스레 변해버린 타루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법원에서 돌아온 후, 부자간의 거리는 이미 멀어진 뒤였다. 그리고도 타루는 1년 동안 계속 집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병든 상태였다. 아버지가 법원에
다시 오라는 요청을 할 것 같은 메시지를 주자마자 그는 가출을 감행한다. 아버지의 수천 가지 눈물 어린 충고, 제 멋대로 살지 말라는 안타까운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18살에 세상에 나온 그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에 마주치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돈을 벌기 위해
하지 않은 일도 없었지만, 사회가 페스트로 상징되는 비인간화라는 정신적 질병에 빠져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그의 투쟁은 유럽 각국에서 싸우지 않은 나라와 정부가 없을 정도였다. 타루가 리 외에게 당신은 나의 친구입니까?라고 물은 뒤 털어놓은 말 중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발췌해 본다. (나는 여기서 페스트를 코로나라는 단어로 바꿔서 다시 읽어보았다)
"또한 이런 이유로, 당신 편에 서서 싸운다는 것 말고는 이번 페스트가 나에게는 별다를 게 없습니다. 나도 당신 만큼이나 명백하게 알고 있거든요. (그래요. 이외 씨. 나는 세상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어요.) 우리 각자가 모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요. 누구도 이 세상에 그 누구도 페스트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잠시 방심해서 감염균을 다른 사람의 얼굴에 내쉬지 않으려고 계속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겁니다.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외의 것, 그러니까 건강이나 온전함, 무결점 등은 의지에 달려 있어요.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예요. 선량한 사람, 거의 누구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가능한 한 방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방심하지 않으려면 의지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요. 리외 씨, 페스트 환자로 있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페스트 환자로 있지 않으려는 것은 더 피곤한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모든 사람이 피곤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날 모든 사람은 심하든 약하든 조금씩은 페스트에 걸려있으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이런 상태를 끝내고 싶어 하는 몇몇 사람이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을 극도의 피로를 자진해서 겪는 겁니다."
이 대화는 사실 3페이지에 걸쳐서 진행될 정도로 긴 부분인데, 3년 전에 읽었을 때에 비하면 약간 다른 이해의 측면이 들었다. 그것은 오랑시를 폐쇄한 정부가 오랑시로부터 다른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면서
오랑시를 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논리는 여러 갈래이지만 결국 맥락은 크게 다르게 읽히지는 않는다. 사회 전체를 위해 부분을 버릴 수도 있는가? 그 부분이 감염되고 범죄화되어서? 이 질문 말이다.
고전은 확실히 어렵다. 그러나 답없는 질문을 주기에 오히려 계속 읽게된다. 그 답이 결국 나에게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가오는 재유행을 추상이 아닌 현실로 다시 맞이 해야하는 개인으로서의 고민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