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맞출필요는 없지만, 할말은 하고 살아야 병이나지 않는다
지난주에 아이는 학원에서 다 같이 가는 놀이공원체험에 가고 싶어 했다. 매일매일
기다리면서 날짜에 맞춰 친구들과 '무엇을 입고 갈지' '어떤 걸 타고 놀지' 이야기하고
매일매일 기대에 부풀어 지냈다.
그날이 되어 그렇게 기대하고 떠난 놀이공원체험. 이제는 엄마아빠 없이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논다는 기분에 한 껏 빠져있던 것도 잠시. 집에 있는 나에게 전화가 온다.
'심심해..' 집에 있는 남편과 나는 어리둥절했다.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는 동생과
온라인으로 시험준비에 바쁜 나의 입장에서 '놀이공원이 재미없다'는 문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이유도 잘 모른 채 '친구들이 바이킹 타러 가면 너 혼자
다른 것 타고 놀아'라고 답을 해주고 끝냈다.
결국 집에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아이의 기분은 좀 실망스러워 보였다. 막상 같이
놀러 가보니 자기랑 맞는 친구가 없고, 같은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의견이 다르고,
자기는 무섭다고 안 탄다고 하니 친구들이 짜증을 내더라는 것이다. 결국 자기 혼자
탈 수 있는 놀이기구를 탔고, 같이 탄 놀이기구마저도 서로 의견이 안 맞아서 앉고
싶은 자리에 못 앉았다고 했다. 엄마 없이 친구들과 떠난 외출은 그렇게 아쉽게
끝났다.
1차 사건은 거기에서 끝났지만, 그 후에도 체육학원에서 만난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색한지
아이들이 계속해서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만났던 친구 3명끼리는
잘도 어울리고 말도 잘하는데 자기는 끼워주지도 않고, 학원버스에서도 혼자 다른
자리에 타고 온다고 했다. 아이는 아직 대처법도 잘 모르지만, 다른 아이들의 의도나 태도
에서 오는 불쾌감은 확실하게 감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왜 자기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런 사건이 하나둘씩 들려올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듣고 말았다. 뭐 나 자신조차도
어릴 때 반친구와 친했던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말이다. 그때 당시에도 이상한 애들도
많았고, 별것도 아닌 걸로 친구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사는 지역에 대한 격차도
워낙 심해서 00에서 온 애들은 집이 못 사니까. 하는 식으로 대놓고 무시하는 애들도 꽤 있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무관심 한 학교 측 태도 때문에 우리 학교
에 문제가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학부모가 되어보니 좀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우리 아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집에서는 받아주는 우리 아이의 행동이 밖에서는 용납이 안될 거라는 걸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이 모든 것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제1 전제. 모두에게 맞출 필요가 없어
오은영 박사님 말씀 중에 한 반에 있는 친구는 어쩌다 같은 반이 된 것일 뿐 나와는 연관성이 없는
애들이 대부분이라는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같은 반 '아이' 일 뿐. '친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도 우리 반 아이들과 나는 그렇게 애써서 잘 지낼 그런 필요가 별로 없는 관계
였다는 것이 갑자기 떠오른다. (어린 나이에 친구관계에 대해 그렇게 고민을 많이 하고 살았던 1인)
지금은 아마 대부분의 아이들과 부모가 이미 그렇게 인식하고 생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서로 어색한 것에 대해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서로에게 피해만 주지 않을 정도면 되는 그런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교사 입장에서 굳이 서로 다른 아이들을 친하게 지내라는 이유에서 갈등이 생긴 아이들을
어색하게 화해시키려 하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선생님 앞에서 하는 화해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마는..)
그리고 학교는 아이들이 단합이상으로 각자의 학습과제와 수행과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교육기관
인데,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심각해져서 학생들이 학습권을 침해받을 정도라면 좋은 것을 추구한다기
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게 하는 것,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집단생활에서
덜 스트레스받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아까와 같은 사례에서 나는 친구들이 심각하게 타격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운동시간을 바꿔서
서로 안 만나는 정도로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제2 전제, 아이 반에 '문제아'가 있을 수 있지만, 반응은 하지 않는다.(부정적인 이슈에 반응을 줄인다)
사실 이 화두는 학기 초부터 상당히 이슈화되어있었던 논제였다. 4학년 반에 계속해서 학습 분위기를
흐리는 아이가 존재한다는 것. 몇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그런 행동을 한 다는 것이다. 아이가
그에 대해 불편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 학기 초 상담 때 걱정을 내 비치기도 했는데, 담임
선생님은 의외로 담담한 반응이 셨다. 본인께서 할 수 있는 조처. 교무실에 보낸다는 가. 모둠이 안된다면
혼자 학습을 시킨다던가 하는 방법들을 적용할 예정이라고. 선생님은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으셨다.
그 와중에도 몇 번의 위기가 들려왔지만, 침묵 속에서 4학년은 그럭저럭 마무리되어가는 중이다.
사실 우리는 그 문제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다. 반에서 문제 일으키는 걸 해결할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다른 아이들과 친해지도록 돕는 것이 답일까? 그것도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라면
다르겠지만 현실 속 교실에서는 반에 어떤 문제학생이 있어도 가급적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면서
불씨를 키우지 않으면서 모두가 조용히 참고 지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어쩌면 내가 학부모 모임에 나가지 않고 그런 모임에서 이야기가 나올 만큼 엄마들끼리 단합이
강하지 않은 것이 한 학년을 무사히 보내는 지름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자극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도저히 교사나 학부모나 학생차원에서 해결이 안 되는 차원의 문제, 그것이 특정 학생에 관한 것일 때는
말을 아끼는 것.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만 최소한의 대응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제3 전제, 우리 아이는 남들이 봐도 예쁜 아이일까?
물론 이것은 외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의 내면과 행동에 관한 것이다. 부모라면 마음은 아프지만
금쪽같인 내 자식의 어떤 행동을 객관화해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큰 아이는 사실 좀 예민한 성격이다. 그것 때문에 인지능력은 상당히 빠르고 눈치도 빠르지만, 감정적인 반응도 크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이 친구들의 괴롭힘이나 놀림 온갖 이상한 행동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것이다. 좋은 것도 100으로 반응하지만 싫은 것에도 200프로 반응한다. 그 반응이 너무 솔직해서
도저히 감출 수가 없다.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이렇게 반응이 뚜렷한
애들을 표적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우리 집 아이는 학교에서 많이도 울었다. 친구들 앞에서도 울고,
선생님 앞에서도 울고. 씨름을 보다가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난다면서 운 적도 있다.
(약한 줄만 알았더니 한동안은 남자애들을 혼내준다며 쫓아가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내가 잔소리를 해도 우는 버릇은 고쳐지지가 않았다. 또 아이의 특성상
금방 울다가 또 금방 웃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 아이의 해맑음에 잔소리를 하다가도 어이없어서
놓쳐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집 큰 아이는 마음에 구름이 금방 왔다가 소나기처럼 뿌리고 금방 해가
뜨는 '빨간 머리 앤 스타일'이었다.
나는 아이의 성격은 이렇게 파악하지만 그렇다고 가치판단을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여러 교육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 본 결과, 타인의 어떤 행동에 대한 아이의
'즉각적인 반응을 차라리 늦추는 훈련'을 자주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상대방이 아이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주었을 때 말이다.
일진이나 불량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자기 무시'하는 것이니 말이다.
즉, 부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울거나 화내는 대신 카운트를 세면서 자신의 반응을 낮추는 것, 담담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내공과 깡이 필요한 부분임을 깨닫는다. 감정적이지 않을 때
내가 쓸 수 있는 전략과 이성 안에서 대응할 수 있는 거라고 자기 암시를 하면서.
너의 이런 행동이 너의 미래에 결국 나쁜 영향을 줄 거라고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해야 한다고.
상대방의 목적에 아이가 휘말리지 않도록 말이다. 결국 학교에서 일어나는 어떤 종류의
폭력이건 내가 대응해서 싸우기 시작한 순간, 양쪽 다 가해자면서 피해자가 되는 걸 마음속에
새기면서 호흡을 가다듬는 이 동작, 아마도 이런 내공멘털훈련이 앞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계속돼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제 4. 엄마의 행동에는 잘못이 없는가.
변명 같지만 이 세계의 '갑'은 결국 어른이다. 아이들이 아무리 잘못이 많다지만 결국
힘을 가진 건 어른들이다. 심장은 대체로 잃어버리고 돈과 법으로 처리하는 법을 알게 되니 말이다.
어른들의 여유 없는 태도에서 아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머리로 대응하는
법을 배운다. 내가 울 때, 아프다 할 때 찾아오지 않는 엄마는 나와 더 이상 감정적으로 이어진
존재가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같은 반 아이의 괴로움을 알리가 없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시전 한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물질적인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우리는 그런 관계를 맺고 산다. 엄마가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곧 나에게 주는 돈과 물질의
크기와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나이가 먹은 아이들은 엄마를 대신할 대체품대신
스트레스를 풀면서 자기 과시를 한다.
결국 아이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배우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가진 소유물들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얼굴이냐 어떤 옷을
입었냐가 자기 자신이라고, 혹은 자기가 다니고 있는 직장이 곧 자신의 얼굴이라고.
그 말도 일부는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하는 행동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타인의 행동에 대한 반응이 곧 자기 자신이다.
게임은 잘하지만, 동생과의 게임에서 단 한 번도 지는 것을 용납 못하는 우리 집 아이, 동생이
느리다면서 구박하는 큰 아이, 또 언니에게 졌다며 매일 우는 동생. 그러다가 아이를 혼내는
나 자신. 우리 가족의 그림이다.
결국 우리 가족의 어떤 태도나 행동은 아이의 사회생활 그 자체인 걸 수도 있으니
오늘도 거울을 한 번 비춰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