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보물들

-고전 열하일기 속 숨겨진 역사적 진실들-

by Who am I

고전은 어렵다. 더욱이 동양고전은 더 어렵다. 아시아 문화권에서 한자교육을 받고 자랐는데도 그렇다. 심지어 전공으로 국문학을 택했는데도 고전문학시간만 되면 '과연 이것은 내가 넘기 힘든 벽이구나'라고 실감했었다. 그런데 정말 인생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40이 넘어, 고전을 자발적으로 독학하고 있는 내 모습이다. 예전에는 시켜도 안 했던 고전 공부가 갈수록 재미있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인가. 마치 지식의 보물상자를 연 기분이었다. 어릴 적에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들을 새롭게 찾는 재미란. 나는 처음으로 내 전공에 감사했다. 지금까지 돈은 못 벌어줬지만.



대학교육의 무효성을 주장했던 의견이 있었다. 특히 인문학에 대해. 21세기에 왜 이런 학문들을 배워야 하는가?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지. 여기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었던 답변을 했던 미국의 어느 교수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학교 교육이란 씨를 뿌리는 과정이지 수확의 과정이 아니라 했다. 학교에 있는 동안 결과를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과정 중에는 자신이 왜 배우는지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이 교육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 채 학문의 첫 장과 맛을 본 채로 졸업한다. 그런데, 그 교수님의 말에 의하면 졸업하는 그날이 학문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학교 문을 벗어난 학생들은 자신들의

인생의 터전에서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과거에 자신들에게 던졌던 그 질문들을 다시 떠올린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현장에서 학문이 던졌던 그 질문을 자신만의 답으로 찾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생겨난 또 다른 의문을 찾아서 마치 연어가 자신의 본능에 따라 강물을 따라가듯 지식과 교양을 찾아간다. 석사 또는 박사의 길을 걷는 것은 소수의

특권이지만,

일반인들에게도 평생교육이라는 개념이 이런

의미로 존재하는 것. 과거에 잠깐 미국에 공부하러 갔었던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나이 먹은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 놀랐다. 비교적 저렴한 학비에, 낮은 문턱에, 학습지원센터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반인들이 쉽게 평생교육을 받고 있었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한번 졸업하면, 비용과 시간 때문에 일반인들이 좀처럼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은 형편인 것을 고려한다면 부러운 환경이었다. 지식과 교양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영남대학교 김혈조 교수님의 국역본 중 2권.사진과 주석이 풍부해서 좋다
중앙일보 최정동 기자가 2000년대 직접 탐방한 내용을 담은 책 . 최근 중국사회에서 사라져간 문화재들에 대한 내용이 독자를 안타깝게한다


연암의 열하일기를 교양서로 읽는 것은 마치 초보 등산가인 내가 마치 북한산을 오르는 일 같다. 내가 오늘 정해진 코스를 간다 해도, 내가 북한산을 아는 것은 아주 일부의 정해진 부분에 불과하다. 한역으로 된 번역본을 읽는 데도 무려 3권을 통독하는 데 좀처럼 쉽지 않다. 어찌어찌해서 진도가 나아갔나 싶은데, 다시 돌아와서 또 읽으면 모르는 것투성이다. 나는 고전의 문을 열었을 뿐인데, 나에게 불어오는 것은 산허리에 불어오는 바람뿐이다. 심지어 나는 가이드 삼아 해설서를 구해다가 3권 정도 읽었는데, 그래도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했다. 그만큼 그가 펼치는 지식의 양은 방대하고, 그가 다녀온 중국은 너무나 넓고 역사는 너무나 길고, 나의 두뇌는 허약하다. 그럼에도 트랙터도 아닌 호미로 긴 밭은 파는 것 같은 끝없는 여정에도 불구하고 퍼올리는 지식들이 너무나 보물 같아서,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소중하다. 내가 발견한 이 작은 보물들이 세상의 가치와 같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 인생에서 얻은 제일 가치 있는 것들이긴 하다. 왜 이런 우리 고전 속의 보물들이 아직까지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걸까 궁금할 뿐이다.


연암은 18세기에 주류였으면서도, 비주류였다. 그의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했다. 연암의 책은 권력의 최상층인 정조가 읽을 정도였지만, 정조는 그의 문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화제는 얻었지만, 후손들은 책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를 꺼렸고, 책을 태우려고까지 했다. 그렇게 200년 가까이 책은 출판되지 못했고, 20세기 초반이 되어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연암집 중에서도 열하일기 전편이 국어로 쓰여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2017년, 열하일기 국역본, 돌베개, 서문 중에서)

수많은 교양서와 문고판이 존재했고, 심지어 중고등학교 교과서와 수능 지문으로 나올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의 저작은 그 가치에 비해 충분히 평가된 것 같지 않다. 만약 그가 영국 또는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엄청나게 많은 학자들이 논문을 썼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 대작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문화가 서양의 문화와 접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외국인이 쓴 객관적인 청조 시대의 사회상을 다뤘다는 점에서. 사진이나 고증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시대에 사진에 가깝게 문화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내가 현재 읽고 있는 국역본은 영남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님인, 김혈조 교수님의 국역본이다. 중간중간 주석을 읽다 보면, 연암은 기존에 없는 새로운 한문을 창조까지 한 경지에 이른것을 알수있었다. 예를 들어 마태오 리치의 무덤과 같은 곳에 가서 무덤의 기와를 설명할 때, 연암은 기존의 한자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한자는 적어도 동양의 세계까지는 표현할 수 있었지만, 아직 접하지 않은 서양의 세계에 도달했을 때 그는 기존의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되는 세계가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중국의 통해 바라본 간접적으로 바라본 지구 반대편 세계와 문명의 빛을 그는 잠시나마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진짜 그 세계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세계 일주 배를 탈 수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탔을 그런 위인이었다.


여행거리 총 2500리.7,8월 삼복더위에 오로지 도보와 말과 배를 타고 6개월을 갔다. 열하로가는 막바지에는 사신도 하인도 모두 눈을감고 졸면서 걸었다 한다


압록강을 건너가면서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떠올리는 당대의 지식인이라니..


목숨을 걸고 갔던 여행에서 돌아와 자료만 10년을

정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일부만 본건데도 말이다

1리는 0.39km인데 부산까지가 400km정도이다

2500리는 1만 키로정도로 환산 할 있는데

왕복을 합치면 아마 더 될지도)


그가 중국 너머의 세계를 갔더라면 얼마나 멋진 견문록들이 탄생했을지, 나는 글 속에서 저자의 그런 욕망을 느꼈다. (예를 들어 사신 일행이 갑작스레 북경에서 열하행을 하게 되었을 때, 사신들이 만약 황제에 의해 귀양이라도 가게 되면 자신은 조선으로 귀국하지 않고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딴생각을 하는 장면이라니)


그가 처음에 책을 쓰고 은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또 300년 후 내가 지금 읽을 때 발견하는 지식들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료 유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못 받은 것은, 책의 출판을 늦추도록 한 이유 중 하나였다.

과거 그가 책의 첫머리부터 연호를 이미 망해버린 명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청을 기준으로 한 날로 썼기 때문이다. 그는 청나라에 들어가 여행하면서 당연히 청이 기준인 역사기록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며 이렇게 밝혔지만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청나라는 우리에게 병자호란의 수치의 기억을 준 나라이기에, 잊어버리고 배척해야 할 오랑캐 국가에 불과했다. 덕분에 책은 첫머리부터 실질적인 것에 눈뜨지 않은 일부 지식층을 배제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소신 덕분에 책의 가치는 높아졌지만, 역설적으로 많이 연구되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그를 비롯해 시대의 천재였던 조선 문인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이 역사에 남은 것은 소신을 가지고 저작들의 가치를 평가해 주석을 달아주고 해설서를 쓰고 기록을 남긴 동료 문인들의 역할이었다. 보석도 소중하지만 보석을 세공하는 장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책을 만드는 사람은 저자 한 사람이 아니라 번역자와 편집자 이기도 한 것.

심지어 열하일기를 읽으며 놀랐던 부분은 그가 북경의 유리창 (청나라 시대 인사동 역할을 하던 거리,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이 자주 드나들던 곳으로, 서양과 세계 유명 책들이 이곳에서 팔렸다고 함)에 들러서 찾은 조선인 저자들의 책들이었다. 연암은 그곳에서 허준의 동의보감과 허난 허설의 시집을 발견한다. 조선인이 저자인 책이 중국의 유명 책 서점에서 번역되어 팔리는 것도 신기했던 연암은 사고 싶지만 돈이 없었다고

( 술 마실 돈이 있었으면, 좀 아끼지.. 돈이 없어 못 샀다니) 핑계를 대며 책을 베끼기 시작한다. 그렇게 연암이 베껴온 동의보감 서문에는 중국인 저자가 허준을 허균으로 착각해 잘못된 내용을 적었다고, 또 중국인 저자는 허준의 능력에 비하면 그가 태어난 곳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적었으니 연암이 책을 사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이것 때문이지도 모른다.

허난설헌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썼다. 여성 시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남성 유학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도 중국인 저자는 필자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했다.

한 국가에서 인재가 태어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인재가 빛이 나도록 도와주는 것은 높은 인식을 가진 주변 지식인들의 노력이라고. 뛰어난 의사도 있었고, 뛰어난 여성 시인이 있었고 외국에서도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할 정도였지만, 부족했던 것은 그 소중한 기록들을 정확하게 전파하고 번역하는 이들의 노력이었다. 만약 청나라 저자들에게 허난설헌이나 허준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조선의 지식인이 있었다면 당시에 이들이 이런 왜곡된 정보로 출판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라의 국력을 키우는데는 소프트 파워 즉, 문화의 힘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의 힘을 살린다는 것은 국가의 가치를 높여주는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가.

연암 자신은 연행 중 지식들을 만나 토론하면서, 왜곡된 역사관과 지식을 수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여행자이기도 하지만 문화외교관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가 진작부터 민족주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실증적으로 탐구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지식 탱크로 그는 보다 자신 있게 조금도 기죽지 않고 청나라 지식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달할 수 있었다. 나는 발로 뛰는 지식인이었던 그의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책을 읽는 것은 힘들지만, 다음편에서는 역사 수업 시간에 배우지 못했던 옛사람들에 대한 정보와 문화에 대한 사례를 찾아 기록하고자 한다. (나 역시도 책을 읽으면서 한국사에 대해 고정된 관념을 가져왔음을 알게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흔히 알다 시피 상투만 틀고 갓만 쓰고 댕기머리에 흰옷만 입고 다닌 것이 아니었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아시아국가들이 정치적

몰락을 하긴했지만 문화가 떨어져서도 아니고

배우고자하는 노력을 안했던 것도 아니라는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