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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덕 Mar 20. 2022

24살, 귀국 (최종)

공익 생활의 시작

훈련소 수료 후, 나는 남은 기간 동안 복무할 근무지를 배정받기 위해 다음날 바로 구청으로 향했다.

구청에 도착하자 미리 도착한 나처럼 머리를 빡빡 밀은 세 명이 먼저 도착해 무엇을 작성하고 있었다.


"아 서유덕 요원이군요, 이쪽으로 앉아서 이거 먼저 작성하고 있으면 돼요."


나는 종이 뭉치를 받은 후 자리에 앉아 개인정보와 동의서 같은 것을 작성했다.

한창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와중에, 면담을 위해 자신을 팀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내 서류를 가져가더니 조용히 읽어보았다.


"어 그래, 지금 학생인가?"

"예, 그렇습니다."

"어디 학교?"

"해외에서 유학하고 있습니다."

"오늘 전부 엘리트들만 왔네."


그리고 그는 서류를 내려놓고 돋보기안경을 아래로 내리며 나를 보며 질문을 계속 이어나갔다.


"공익은 왜 왔어?"

"어렸을 때 축구하다 눈을 좀 다쳐서 왔습니다."

"또 어디 아픈데 있어?"

"제가 허리 디스크가 있습니다."

"그건 젊으니까 금방 나아. 몸은 튼튼하니 일 잘하게 생겼구먼."


그의 어이없는 답변에 매우 당황했다. 젊으니까 금방 낫는 다라..

분명 내가 허리 때문에 얼마나 일상생활에 고충이 있는지 잘 모르니까 하는 말이리라.

그는 이후 질문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잠깐 20분 정도밖에 나가 있다가 돌아오라고 했다.


"담배 피시는 분?"


한 명이 먼저 나가서 담배를 피자는 제안을 했다. 

나와서 그들이 흡연을 하는 동안, 이야기를 했다.

정말 대부분이 유학생이 맞았다. 미국, 중국 등의 나라에서 유학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2명은 구청의 다른 과로, 나와 다른 한 명은 각각 동사무소로 배정이 되었다.

담당자의 전화번호와 이따 동사무소로 가라는 말을 들은 뒤 각자 남은 복무기간 잘하라며 인사하고 헤어졌다.

나는 바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동사무소에 방문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혹시 지금 가도 되겠습니까?"

"네, 지금 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신경 써서 입고 나올걸 그랬나 보다. 

별생각 없이 그냥 츄리닝에 운동화 차림으로 나온 것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나는 바로 동사무소로 향했다.


동사무소에 도착해 담당자를 만났다. 나보다 5살 정도 많은 형이었다.

담당자 형은 나를 데리고 돌아다니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시켜주었다. 

모두 나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동장, 팀장과 함께 면담을 끝난 뒤, 자리를 안내받았다.

소집해제까지 일주일 정도 남은 선임도 만나게 되었다.


"반가워요. 밥 먹었어요? 마침 점심시간이네.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는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었다. 나는 부대찌개를 먹으며 그에게 여기서의 생활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질문했다. 


"원래는 세 명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나 하나예요. 조금 더 빨리 왔으면 같이 지내면서 재밌었을 텐데."

"담당자 형도 착한 사람이니까 친하게 지내면 좋을 거예요."


그는 앞으로 일주일 동안 3일 정도밖에 나오지 않을 예정이라 자기를 자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잘해보라는 말과 함께 그는 그렇게 소집해제를 하고 나는 사무실에 유일한 공익이 되었다.


나는 공무원들이 이렇게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고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도 이래저래 불러 다니며 

그들과 함께 이런저런 잡무들을 처리했다. 특히 근무하던 초반에는 '아이스팩 수거'라는 일을 했는데,

이게 진짜 나를 반쯤 죽여놓았다.


2~3일에 한번 꼴로 동에 있는 아파트들을 돌며 분리수거된 아이스팩을 따로 수거해 쓰레기장에 갖다 버리는 일이었는데, 이게 구내에 있는 동사무소마다 누가 많이 가져다 버리는지 경쟁이 붙어 상상을 초월할 양을 

모아 쓰레기장에 버리곤 했다. 보통 포터에 10톤에서 15톤 사이를 3명이서 적재해 가져다 버리곤 했다.


이 일을 할 때 정말 허리가 찢어질 뻔했다. 무거운 것을 하루 종일 들다 보니 요통이 정말 심했다.

병원에 가서 신경주사를 맞고 나서야 도저히 못할 것 같아 담당자 형에게 고충을 말했다. 


"진작에 말하지. 내가 이런 거 시키지 말라고 얘기해놓을게요. 몸조리 잘해요."


 결국 나는 이 업무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나와 같이 이 업무를 하던 공무원들에게 머리 쓴다고 

핀잔과 눈치를 좀 받긴 했으나 이것을 계속하다간 내 허리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동사무소가 워낙 많은 악성민원인들로 악명이 높다 보니, 매일 그런 민원인을 직간접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좀 지치기도 하였다. 뭐 그리 다들 소리부터 지르고 욕부터들 하는지.


솔직히 내가 항상 생각해왔던, 갔었던 동사무소와는 좀 많이 달라 충격을 받았다.

공무원 조직도 내가 생각하던 조직과는 상당히 달랐다. 생각보다 엄청 관료주의적이어서 상당히 놀랐다.

많은 갈등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확실히 근무 초반에는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하다 보니 부침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직원들과 친분이 생기고 나도 매일 정해진 일과에 익숙해지다 보니 생각보다는 빨리 적응을 할 수 있었다. 또 내가 유일한 공익이다 보니 직원들이 편의도 많이 봐주고 나를 잘 챙겨주었다.


공익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는 남는 시간에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 혼자 책을 사서 이래저래 풀어보았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어떻게 보면 한국 대학 편입으로의 첫걸음이었다.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계속 마음 한 구석에 세워놨던 한국 대학 편입 계획들을 드디어 실행할 시기가 온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토익을 준비했다. 

공부기간은 3~4주 정도로, 나는 이후에 바로 시험에 응시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편입판에서 그다지 높은 점수는 아니지만 꽤나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토익 점수를 가지고 지원할 수 있는 대학에는 지원해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토익 시험이 끝나니 바로 편입 지원시기가 되었다.

나는 일단 토익으로 편입을 지원할 수 있는 두 곳의 대학에만 지원했다.

토익 시험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정말 어려웠던 것은 지원 서류 준비였다.


해외 유학생 출신이다 보니 이런저런 서류가 정말 많이 필요했다. 

또 그 서류들이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돈이 많이 요구되는 서류들이라 더욱 구비하는데

애를 먹었다.


결국 서류 구비에서 사달이 나고 말았다. 서류에서 문제가 생겨 나는 지원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허무하게 내 첫 번째 편입 도전이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올해의 지원은 어차피 내년의 실패를 대비했을 때의 대비책과도 같은 지원과 준비였을 뿐,

진짜 게임은 공인영어가 아닌 편입영어를 공부하고 볼 내년으로 정조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허무함을 느끼면서 연말을 맞이했다. 올해를 뒤돌아봤을 때, 올해도 참 다사다난했었다.

연초를 하와이에서 행복하게 시작해서 올해는 무언가 좋은 일로 가득할 거라는 느낌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내던 미국 집에서 외삼촌이랑 싸우고 나오지를 않나,

할머니, 할아버지를 간호하고 케어하면서 학교 수업 따라가기 위해 애를 먹지를 않나,

전세계적으로 역병이 돌아 골치를 썩질 않나,

그것 때문에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한국으로 귀국을 하지를 않나,

갑자기 영장이 나와서 복무를 시작하지를 않나..


20대 초반에는 지나온 나의 나태함이라던가 능력 부족, 불운 등을 탓하며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나 미련 등으로 계속 마음이 과거에 잡혀 정신적으로 힘들었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였다.


다시는 그러한 상황 등을 만들지 않고 대비하려 지난 2년간 최선을 다해 미래에 대해 대비하고 대비했다.

그 다가올 미래들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항상 그것들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고 느꼈다.

특히나 대비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내가 예상치도 못한 부분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더욱더 그러한 것들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보니 더 완벽주의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음이 쉴 틈이 없고, 여유가 없어졌다.


매일매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에 대비를 하고 걱정을 하며, 나 자신을 괴롭혔다.

올해를 뒤돌아보다 보니, 그러한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당장 1분 뒤의 일도 예상하지 못하는 게 인간인데.. 뭐를 그리 대비하려 하고 겁냈나 싶다.


그냥 하루하루, 순간순간 진심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현재를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건 고됐던 미국에서의 생활은 이제 뒤로 접어두고 한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또 열심히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또 다른 기대감을 가지고 2021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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