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할만했다
나의 계획과 예상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는 경우가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가 그러했다.
2월 말, 친구들과 퇴근 후 코엑스에서 즐겁게 저녁식사를 하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개원강의를 하러 갈 때에도
내가 어느 순간 이렇게 집에 틀어박혀서 재택근무를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확진자가 하루 1000명을 넘기기 시작하고
교회에서의 집단감염 기사가 모든 신문과 방송을 도배할 때쯤
나는 불현듯 4년간 집에 모시던 베이비시터님과 전화로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회사 직원에게 부탁해서 회사 안에 있는 짐을 퀵서비스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부터 기약도 없고 이모도 없는 워킹맘의 재택근무의 삶이 시작되었다.
재택을 시작하기 전의 삶과는 달리 종전과는 달리 많은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삶이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 싶었으나, 지금은 이래도 되지 싶다.
내려놓으면 큰일 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 재택근무 워킹맘의 하루
7시반쯤 아이가 일어나면 아빠와 함께 1시간 정도 TV를 본다.
그 사이에 나도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집을 대충 정리하고
새벽배송으로 도착한 식재료 들을 정리하고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9시부터 2시간 정도는 아이와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놀아주다가
11시 경에는 같은 동에 있는 친정에 아이를 데려다 준다.
이 때부터 업무를 시작해서 4시 30분 정도까지 쉬지않고 쭉 일을 한다.
4시 30분 정도에 아이를 데리고 와서 다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불러주면서 놀다가
7시반쯤 남편이 퇴근하면 저녁을 먹이고 9시까지 또 놀아주다가 재우면 육아는 끝난다.
이 때부터 1시간 정도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10시부터 식탁에 앉아 새벽 1시 정도까지 일을 한다.
이렇게 따지면 근무시간은 약 8시간 30분 정도가 나오고,
회사에 출근해서 일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매우 다행히 시댁이 멀지않아 일주일에 2번은 남편이 출근길에 아이를 시댁에 데려다주는데
이 날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 정도까지 밀린 서면과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하는 리서치를 한다.
그리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가장 인적이 드문 숲으로 갔다.
숲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걷고 들어오면 또 1주일간의 감금생활을 견딜 힘이 생겼다.
2. 재택근무에 적응하기까지의 과정들
재택근무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꽤 긴 시간 동안 좌절하고 우울해했다.
특히 개업 1년차, 지금까지 뿌려둔 상담의 씨앗들이 싹을 틔울 무렵
집에 틀어박히고 나니 우울감이 극에 달해서
잠도 쉽게 이루지 못해서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극심한 우울감과 분노가 찾아와서
반쯤은 정신을 놓고 화를 내고 아이에게 소리도 가끔 버럭버럭 지르는 날이 찾아왔다.
화를 내서 아이를 울리고 나면 나에 대한 자기혐오가 밀려와서 나도 울었다.
어느 날 남편이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아침 시간,
여느 일상과 다름없이 출근 준비를 하고 본인의 업장으로 나가는 남편이 부럽기도 하고
일은 밀려 있는데 유치원에 가지 않는 아이와 씨름을 해야 하는 상황에 화가 나있던 그 찰나
아이가 방문을 잠가버리고 "엄마 안방 들어가봐. 꺄르르륵"하고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하필 그 전날 집 공사가 있어서 모든 창문을 잠궈두고 방문의 모든 열쇠도 안방에 있는 가방에 넣어두었는데.
그 순간 반쯤 이성을 잃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괴물처럼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보기 싫은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날 분노와 우울의 최고치를 찍고 폭발까지 한 이후
체념기가 찾아왔다.
화를 내어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라면 화를 낼 에너지라도 아끼자, 라는 마음으로
달라진 일상에 적응해보기로 노력했고
자극적인 뉴스 기사를 멀리 하고 일상의 소소함을 즐기는 일상V로그들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찾아보자. 라는 마음을 먹고 나니
체념 혹은 순응기가 찾아 왔다.
3. 크고 작은 위기도 찾아왔다
변호사 업무는 대면업무보다는 서면작업이 많아서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편은 아니었다.
특히 코로나 감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시기에는 가장 보수적인 곳인 법원조차
대면 재판이 아닌 화상재판을 시도했고 감염예방을 위해서 급하지 않은 사건의 변론기일을 모두 5월 어귀로 변경해주었다.
하지만 경찰서나 검찰청은 사건처리기한이 있다보니 코로나와 무관하게
피의자 조사도 잡고 고소인 조사 일정도 진행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감염자가 폭증하던 시기에 경찰서에서 수 시간을 조사 입회하는 일이 있었다.
돌아와서는 2주 정도는 외부 미팅을 잡지 않고 가족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자가격리에 가까운 격리생활을 했다.
재택근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외부 미팅은 줌 앱으로 진행했다.
내가 함께 하는 단체의 이사회부터 의뢰인과의 사건진행회의까지 모두 줌으로 이루어졌다.
아무래도 젊은 의뢰인들은 줌 앱을 통한 회의에 대해서 큰 반감이 없었지만
연령이 높은 의뢰인들은 줌을 통한 회의 진행에 부담을 느끼는 눈치였다.
하지만 막상 의뢰인을 설득해서 줌으로 회의를 진행해보니 서로 시간 손실이 적어서 만족스러웠다.
이 사이에 4월 말에 내가 함께 하는 이사회에서 줌 앱을 통해서 월례 주제발표 회의가 열렸다.
나는 코로나 19 손실보상 관련한 주제 발표를 하기로 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회의시간이 길어지자 아이가 난입했다.
왜 그런 옷을 입고 있냐는둥, 시끄러운 아저씨는 누구냐는둥 질문을 쏟아내다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불과 몇일전에 줌 앱으로 회의하다가 감자로 변신했다는 상사 이야기를 보고 낄낄댔던 내가
아이의 난입 및 울음 대잔치로 내가 발제자인 회의실에서 음 소거를 당하고 말았다.
4. 재택근무의 큰 공헌자
하지만 무사히 재택근무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해보니 고마운 사람들, 고마운 도구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1) 두 어머니들
누가 뭐라 해도 이 코로나 사태에서 내가 큰 흔들림 없이 재택근무를 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가장 큰 공헌자들은 양가의 두 어머니들이었다.
베이비시터 이모님을 모실 때에는 양가의 어머니들의 중요성을 크게 깨닫지 못했지만
이모님도 오시지 않고 유치원도 열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 어머니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난 결국 개업변호사를 포기했거나
감염을 감수하고 외부의 인력에 의존하게 되었을 것 같다.
손자를 보기 위해서 외부 만남도 거의 피하시고 아이와 성심껏 놀아주시는 어머님들 덕에
아이는 이 긴 긴 감금생활을 밝게 보내고 있다.
2) 명상
누군가가 명상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만끽할 수 있다고 했다.
밥을 먹거나, 청소를 하는 사소한 일상의 동작도 그 동작 하나 하나에 집중해서 나를 들여다본다면
그것이 명상이라고.
생존을 위한 단순한 동작들에 의미를 담아서,
그 순간에 그 동작에만 집중해보니 놀랍게도 스트레스가 많이 줄어들었다.
하루 일과를 하면서 답답함과 울분이 쌓일 때
명상앱을 틀고 눈을 감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 내게 드는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최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내려놓고자 노력했다.
3) 적절한 규칙
집안일을 도와주시던 이모님이 없는 상태에서 집 안에서 일을 하고 있자니
온갖 집안일들이 나의 업무시간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릇을 닦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30분이 지나 있고
의견서를 쓰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어느새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정주부인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살다 보니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규칙을 정해서 조금 나를 규율하기로 했다.
첫번째. 적어도 9시 전에는 나를 정돈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두번째. 일을 하다가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 쉬는 시간에만 10분 이내로 짧게 집안일을 한다.
세번째. 일하다 눕지 않는다.
이 정도의 간단한 규칙을 만들어서 적용하다보니
조금은 덜 흐트러진 정신으로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다.
4) 꽃, 정말로 힐링
하루종일 집에서 삭막한 뉴스를 보면서 두려움에 떨던 나에게
2주에 한번 아저씨가 던지고 가는 꽃 택배는 큰 위로가 되었다.
싱싱한 생명이 주는 위안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커서
재택근무 기간 내내 꽃을 시키다가 꾸까 그린 등급으로 승급하고 말았다.
5. 재택근무를 마치며
약 2달간의 재택근무를 마치고 지금은 내 사무실에 앉아 있다.
살면서 다시는 있을 것 같지 않은 길고 길었던 재택근무를 마치고 나서 그간의 시간을 되돌이켜보면
재택근무의 장점은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9시 출근 6시 퇴근 시간 베이스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이었다.
오전 시간에 아이와 내내 놀아주고 한밤에 조용한 시간에 생각을 정리하며 회사일을 시작하는 것도
아주 최악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모님에게 거의 대부분의 육아와 집안일을 의탁하던 내가
이모님 없이 아이와 24시간을 붙어있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많이 싸우기는 했지만 아이의 24시간의 흐름을 함께 한다는 건
아이의 생각과 행동패턴을 읽어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루 중 몇 시간의 조각으로 어떠한 이유로 이 행동을 하고 이런 말을 하는지를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와 같은 스케쥴을 함께 한다는 것 만으로
지금껏 이해하지 못했던 아이의 마음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재택근무를 하기 전의 나는
규율과 규칙으로 아이를 통제하는 엄마였다.
TV는 20분씩 3번 하루 총 1시간
밥은 정해진 자리에서 먹는다. 는 등의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엄마였는데
코로나 시대의 재택근무를 겪으면서 이런저런 규칙들을 조금씩 풀어냈다.
처음에는 마음의 저항이 있었지만 '뭐 큰일이야 나겠어'라는 마음으로
나의 기준들을 조금씩 풀고보니
생각보다 아이는 하루종일 TV를 보라고 해도 어느 새 슬금슬금 장난감을 들고와서
엄마에게 같이 놀자고 청하는 아이었고
아이에게 규율을 들이대고 엄하게 구는 엄마보다는
같이 구르고 웃으며 눈을 맞춰주면 그만큼 사랑으로 보답하는 생명체였다.
다시 코로나19가 재창궐하면 언젠가 다시 집에 갇히게 되는 날이 오겠지만
그 전까지는 어렵게 되찾은 이 작고 소중한 일상을 만끽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