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고 있습니다. 부제는 <김영하의 시칠리아>. 시칠리아 여행기입니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라는 제목이 묘합니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품고 있던 물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여행을 하며 그 답을 찾았나보다-싶지만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라는 제목은 어쩐지 작가님이 찾은건 오래 품고 있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물음. 그 자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기대를 안고 여행길에 오릅니다. 누군가는 권태로운 일상에서 탈피하고자 하고, 누군가는 함께하는 이와의 추억을 쌓고자 합니다. 누군가는 사진으로만 보던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그 지역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색있는 무언가를 직접 맛보고 싶어합니다. 또 누군가는 남들이 다 가니까 갑니다. 남는 여가 시간에 관습적으로 여행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설렘. 대부분의 여행은 설렙니다. 내가 무엇을 마주할지, 어떤 경험을 할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을 미리 예측하고자 계획을 촘촘히 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새로움과 신선함을 만끽하고자 큰 계획 없이 기대만 안고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저는 비교적 후자에 해당합니다. 완전히 무계획은 아닙니다. 해외에 갈 경우 비행기와 숙박장소는 미리 예약하고, 국내의 경우에도 교통편은 미리 찾아 예약합니다. 가면 좋을 곳들과 동선도 대략적으로 찾아봅니다. 다만 여행지에서 계획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않습니다. 여행지에 가는길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즉석에서 추가하기도 하고,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탓에 운영시간을 넘겨버리면 미련 없이 포기하기도 합니다.
방학 기간동안 영월, 수원, 제부도, 안동, 원주 등 당일치기 릴레이를 다녔습니다. 개학 직전 한주간 벌어진 여행입니다. 다시 근무지로 돌아가야할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권태로움과 괴로움이 섞인 하루하루를 보내기 싫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코레일 앱에 들어가 자리가 있는 여행지를 정하고, 기차에 올라서 갈만한 곳을 알아봤습니다.
버스나 기차에서 급하고 러프하게 세운 계획탓에 생긴 해프닝들도 있습니다. 안동은 계획에 없던 여행이었습니다.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소금산 출렁다리와 울렁다리를 볼 생각으로 원주에 가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서원주역에 내려서야 시티투어버스, 소금산 출렁다리 모두 월요일 휴무인것을 알았습니다. 원주 다른 관광지들도 대부분 월요일 휴무였습니다. 서원주역에서 갈 수 있는 노선에서 안동을 정했습니다. 그렇게 늦은 오후 안동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수원에 갔던 날은 태풍 종다리가 온 날이었습니다. 월요일에 실패했던 원주 여행을 갈라했더니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원주 여행은 한번 더 미뤄졌습니다. 오후쯤이면 태풍이 잔잔하지 않을까 싶어 오후 2시쯤인가 수원으로 출발했습니다. 월화원 구경하고 저녁먹고 나니 화성이나 화성행궁 등 원래 가보려고 했던 곳의 운영시간이 지나있었습니다.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화성 성곽길 트랙킹을 시작했습니다. 덥고 습한 탓에 입고 있던 반팔이 땀으로 모두 젖었습니다. 그날 전 팔달산 정상에 오를 줄 몰랐습니다.
여행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살게 해줍니다. 일상에서는 이미 자동화되어 큰 의미 없이 처리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아침 먹고 출근하고 점심 먹고 퇴근하고. 퇴근하고 하는 일도 어느정도 정해져있죠. 운동이나 취미생활, 약속 들. 조금씩 변주를 줄 수는 있지만 대부분 예상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머리는 과거나 미래를 여행합니다. 행복을 반추하기도 하지만 실수를 후회하기도 하고, 목표를 계획하기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에 빠지기도 합니다. 여행은 비일상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 나를 내밀면, 우리 머리는 현재 내게 주어진 감각을 처리하느라 바쁩니다.
여행지에선 머나먼 미래가 아니라 당장 지금 내가 무엇을 먹을지 어디를 갈지 어떤 것을 볼지를 계획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방 그 계획과 기대를 실현합니다. 기대감과 성취감이 빠른 시간내에 연속적으로 다가옵니다. 숙소에 돌아와서야 한숨 돌리며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봅니다. 그리고 인상깊었던 장면과 순간들을 곱씹습니다. 그 시간에서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무의미로 점철된 일상에서 날 해방시켜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맛보게 해줍니다.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여행은, 삶의 축소판 같아요. 계획하고 경험하고 느끼고 반추하며 삶을 행복하게 보내는 법을 알려줍니다. 우리의 삶도 여행같아서 계획도 해보지만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고, 다양한 것을 보고 듣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고, 추억을 쌓고 반추합니다. 하지만 너무 느슨할 뿐이죠. 해야할 것들에 사로잡혀있으면 잠시 긴 여행으로서의 삶을 까먹곤 합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납니다. 잊고 있었던 재미와 의미를 떠오르게 해주니깐.
부지런히 여행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