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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구 Oct 10. 2024

커피중독

커피 중독입니다. 중독이라는 자각도 없습니다. 매일 물을 마신다고 해서 물 중독이라 하진 않지 않으니까요. 맥심 믹스를 넣고, 물은 종이컵의 반만. 부모님의 커피 심부름을 하며 몰래 맛본 첫 커피는 씁쓸함도 달콤함도 아닌, 그저 알 수 없는 맛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아메리카노를 마셔대는 어른이 되기까지. 다른 이들도 비슷한 길을 걸어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카라멜 마키야토: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중학교 2학년 기말고사를 마치고 친구와 한껏 들떠서는 근처 카페에 갔습니다. 카페 띠아모. 이탈리아어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교복을 입은, 커피에 무지한 학생들의 질문에 사장님은 카라멜 마키야토를 추천하셨습니다. 잔뜩 퐁실퐁실한 휘핑크림과 그 위에 듬뿍 달달한 카라멜 시럽은 본연의 원두의 맛을 감추었지만, 감춰진 원두의 맛을 알턱이 없습니다. 달콤함 뒤에 따라오는 스치는듯한 씁쓸함을 커피맛인걸로 배웠습니다.


컵커피: 카라멜마키야토/카페라떼

카라멜 마끼야토가 '커피맛'이라는 맛의 지평을 새롭게 넓힌 후로, 커피를 살 때마다 속으로 어른이 된 듯한 우쭐감에 취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말부터는 도서관 근처 편의점에서 컵커피 하나를 사서 열람실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커피를 사는 행위는 하루 공부 시작을 알리는 의식이었습니니다. 펼쳐진 쎈수학 옆에는 항상 매일유업의 카라멜 마키야토가 함께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괜히 살이 덜 찔 거 같았던 카페 라떼 마일드가 야자 메이트가 되었습니다. 핸드폰도 금지, 연애도 금지였던 기숙사 학교에서 학생들의 풋사랑은 포스트잇과 쪽지를 통해 전달되었고, 매점에서 팔던 커피는 포스트잇과 쪽지를 실은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카페 라떼

동아리 직직속 선배와 주고받았던 학교생활을 응원하는 포스트잇은, 졸업 후엔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담은 편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학창시절 내내 취해있던 달달한 시럽맛은 카페모카, 바닐라라떼를 거쳐 카페라떼, 아메리카노로 옅어졌습니다. 학교 앞 구대회 커피의 카페라떼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무거운 질감의 에스프레소 샷이 우유에 잘 베어들어, 짙으면서 부드러웠고 씁쓸하면서 고소했습니다. 가방에는 쎈수학 대신 추상대수학이, 손에는 편의점 커피 대신 커피 전문점의 카페라떼가 들려있었지만, 커피가 일상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인건 여전했습니다. 평일에는 동기 옆에서, 주말에는 연인 옆에서 커피를 홀짝였습니다.


아메리카노 

질긴 수험생활을 거치며 가장 많이 마시는 커피는 아메리카노가 되었습니다. 독서실 책상 위에는 항상 저가 브랜드의 양 많고 탄맛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있었습니다. 분명 19살이었던 선배는 26살쯤 되어서는 따뜻한 드립커피를 마시곤 했습니다. 커피 본연의 풍미 짙은 향이 옆에 앉은 제 감각까지 깨웠지만, 기계가 뽑아낸 에스프레소 샷에 물만 부은 커피를 아이스로 마셔버리는 고집은 꺾지 못했고, 선배는 저보다 겨우 두살 많으면서 아직 어려서 커피 맛을 모른다고 놀리곤 하였습니다. 저를 놀리던 선배의 나이를 따라잡고 나서야 원두 맛을 고르며 따뜻하게 마실 줄 알게 되었고, "많이 컸지?" “많이 컸네” 하며 금방 지나버린 시간들을 안주삼아 노닥거리곤 했습니다.


빈컵

제 일상엔 언제나 커피가 있었고, 선배는 제 일상이었습니다. 어떨땐 달콤하고 어떨땐 씁쓸하고 어떨땐 진하고 어떨땐 연했습니다. 선배는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대화는 산책하며 나누기로 했었습니다. 항상 보던 모습 그대로 앉아있었지만, 몇년간 끼고 있던 반지 자리가 휑했습니다. "반지 뺐네?"라는 말에 급하게 선글라스를 끼며 눈물을 감추는 모습이 안쓰러이 우스웠습니다. 귀엽기도. 그런 순간에도 전 커피는 마셔야한다며 커피를 테이크아웃했고, 1시간인가 2시간인가 손을 잡고 포천천을 걸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커피를 마셨습니다. 잘살라는 말은 도무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종결을 내뱉는것 같았습니다. 사랑이 비어버린 빈컵을 손에 들고 집에 돌아와서야 울 수 있었습니다.


커피중독

그 이후로 며칠이 제가 커피를 마시지 않은 유일한 기간입니다. 겨우 며칠이 지났다고 목과 혀가 카페인을 찾아댑니다. 커피를 위한 텀블러를 샀습니다. 학교에 커피머신이 있습니다! 출근하자마자 제빙기에서 얼음을 담고, 에스프레소 샷 2개를 뽑습니다. 뜨거운 에스프레소 샷이 얼음을 녹여 조금 진한 농도의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됩니다. 거기에 다시 얼음을 넣고 물을 조금 부으면 카페에서 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다를게 없습니다. 잠시 비워졌던 컵엔 다시 커피가 채워졌고, 다시 일상으로 부르는 궤도를 커피와 함께 걷습니다. 이 글도 커피를 마시며 씁니다. 오지 않은 내일에도 제가 뭘 하고 있을지 압니다. 커피를 마시고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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