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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구 Oct 25. 2024

변화는 명사로 쓰여져도 동사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변화를 시시각각 실감하는 일이다. 첫번째로, 아이들의 성장은 눈에 보인다. 내면도 물론 성장하겠지.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쑥쑥 자라나는 아이들의 키다. 1학년때 자주보던 아이를 3학년이 되어 마주치면 언제 1학년인적이 있었냐는듯 보란듯이 3학년이다. 내 아랫 가슴깨나 있었던 아이가 어느샌가 내 가슴팍에 와있다. ‘변화’라는 단어가 시각적으로 선명하다.


 두번째로, 아이들은 그 자체로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는데, 그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그 변화가 상당하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소복이 쌓인 눈. 뽀드득 소리에 귀기울이며 조심스레 밟다보면 20년 전 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 떠오른다. 소복이 쌓인 눈을 주저 없이 뛰어 밟았다. 하얀 눈에 들떠 놀다보면 뽀드득 소리에 귀기울일새가 없었다. 볼이 다 빨개진 상태로 집에 들어와 느낀 아늑함을 곱씹는다. 바깥에선 추위를 모르고 놀았기에 집에 돌아와선 몸이 가려워 벅벅 긁어댔다.


어린시절 나는 반장 선거철이면 항상 손을 들었다. 남들을 이끌고 주목 받는걸 좋아했다. 사실 리더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선생님의 심부름꾼일뿐이었지만 감투 쓰기를 즐겼다. 지금은 전두에서 지휘하기보다는 그 뒤에서 서포트하기를 더 좋아한다. 감투를 쓰는 일은 명예만 떠안는게 아니라 책임과 원망까지 모두 떠안는 일이고, 누군가를 끊어내는 결단력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앞서 싸워주는 군주 뒤에서 그를 도우며 군주의 인정을 받는 정도면 충분하다.


20년의 시간은 그렇다. 처음과 끝만 나란히 두고 보자면 변화가 새삼스럽지만, 난 그 변화를 의도하지도 않았고 의식하지도 못했다. 그 사이를 메운 거대한 시간이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나로 흘려보냈다. 어쩌면 변화는 결과론적일지 모른다. 은근하게 흘러낸 시간이 깎고 퇴적시킨 새로운 바위의 모습인 것이다.


'시간'은 명사로 쓰여도 항상 동사다. 아주 은근하고 조용해서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흐르지 않는 시간은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 시간은 ‘일정하게 흐른다’는 속성 하나로 우리를 조바심나게 한다. 재촉하고 싶어질 때에도 일정하고, 붙잡고 싶어질 때에도 흐른다.


변화를 원할 때는 시간을 재촉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변화는 꾸준함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글쓰기에 관심이 생겼다. 8월에 시작했으니 이제 세 달 되었다. 관심은 욕심을 부른다. 글을 잘 쓰고 싶다. 잘 쓰고 싶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선 명문을 많이 접해야한다. 글로 녹여낼 알맹이들(경험과 생각 등)을 만들고 채워야한다. 결국 많이 써봐야한다. 하나하나 절대 짧은 시간 내에 이뤄질 일이 아니다. 작은 시간들로는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책을 계속 읽고 있고, 글도 계속 쓰고 있으나 나아짐을 모르겠다. 아직 젊으니 투자할 시간이 많겠지 떵떵대봐도 시간은 당겨받을 수 없기에, 결국은 그 인고의 시간들을 알차게 채워 흘려보내야한다. 차곡차곡 퇴적된 시간의 모습이 곧 변화다.


한편 나는 변화를 두려워한다. 지금의 내 상태가 좋다. 원가족 울타리 안에 살며 책임에서 보다 자유롭다. 퇴근하고는 그냥 나 먹을 저녁거리 하나 사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면 된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친구도 여럿 있다. 무언가 증명해내지 않아도 될 나이이다.  지금 나의 아늑한 알을 깨고 싶지 않다. 이럴때면 시간을 붙잡고 싶다. 시간은 나를 성장해야한다고 떠미는데, 이에 저항하고 멈춰있다보면 멈춤이 아니라 퇴보가 되어버린다. 퇴보는 퇴보대로 성장은 성장대로 나를 조물거린다. 아니 난 지금 모습 그대로 멈추고 싶어. 안전함과 아늑함을 잃어버릴까 마음이 흔들린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소복이 쌓인 눈. 조심스러운 25cm 발자국 옆에 이미 저만치 앞서 남겨진 20cm 발자국이 있다. 25cm 발자국의 보폭보다 더 큰 보폭을 남겼던 20cm 발자국은, 미래의 자신이 뛰지 않을 거라고는 미처 몰랐을 거다. 시간은 쉬지 않고 자아를 깎아내며 새로운 세계를 퇴적시킨다. 안전함과 아늑함을 잃을까 변화를 외면해도 어찌되었던간에 변한다.  


결국 변한다면, 정체 되어 있기보단 흐르고 싶다. 자연히 받아들이고 그 흐름으로 훨훨 날고 싶다. 불안함과 두려움을 딛고 새로운 세계로 힘차게. 그 새로운 세계가 어느 세계일지, 지금의 나는 알지 못한다. 발을 구르기 전 발의 미세한 각도를 조절하는 것만으로 나의 의도를 담을 뿐이다. 내가 날아가고 싶은 세계에 가까운 쪽으로 날개를 펼 뿐이다. 시간의 흐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흐름 위에 몸을 얹을 뿐이다. 아니 난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시간 위에 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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