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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구 Oct 29. 2024

소리를 적어내는 것은

어디에선가 쿵(챙)- 쿵(챙)- 쿠쿠쿵(챙챙챙)- 북소리, 장구소리,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다. 음악 시간에 풍물놀이를 배우나? 각자 연습한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데, 벌써 이만치 합을 맞춰 치는 게 대견하다. 원래라면 개성 강한 아이가 합 맞추기를 못 참고 그 사이쯤 깨갱! 깽깽!! 칭! 하고 소리를 내줬어야 한다.


소리를 글자로 옮기는 일은 어렵다. 장구소리도 쿵- 북소리도 쿵-. 들을 땐 분명 다른데 소리를 글자로 옮기자니 소리의 질감이 다 날아가버린다. 장구의 쿵-은 딱 장구 북편의 두께만큼 무게가 가볍다. 소리가 커도 통통 튀는 소리가 멀리 나가지 않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북소리의 쿵-은 조금 더 무겁고 울림이 크다. 그 주변 공기까지 함께 울려댄다. 묵직한 공기의 울림까지가 북의 질감이다. 소리 질감을 제대로 옮겨보겠다고 유심히 들어보는데 북-북-이다. 저게 무슨 소리일까 생각하다 이내 북소리군 알아차리곤 그래서 이름이 북이구나 허탈히 웃음이 난다.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하는 일은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피아노곡을 선별해 틀어두는 일이다.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인터넷에서 산 싸구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세기가 큰 음에서 소리가 지저분하게 갈라진다. 디지털화된 음은 저렴한 스피커를 거쳐 거칠어진다. 그럼에도 음률이 마음에 들어 작게 틀어둔다. 거친 음은 작아진 소리에 묻힌다. 소리에 온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피아노 선율은 공기를 녹인다. 사실 틀어둔다고 공기가 따스해짐을 느끼는 건 아니다. 유튜브 재생 시간이 다 되어 소리가 멈추면 흐르는 적막에 공기가 차가워진다. 그럼 그제서야 선율이 공기에 온기를 더했었구나- 알아차리는거다.


타악기의 소리나 피아노의 선율이나 둘 다 ‘소리’ 임은 분명한데 그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 하나는 높낮이 없이 투박한 리듬감과 흥겨움으로 존재하고, 하나는 다채로운 높낮이의 유연함과 조화로움으로 존재한다. 타악기의 소리는 글자로 흉내라도 내겠지만, 피아노의 선율은 단어로 옮길 수도 글에서 읽어낼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낮이에 도레미파- 이름을 붙였나 보다. 하지만 도레미파-는 특정 음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일 뿐 소리는 지워진 글자다. 피아노의 멜로디와 건반의 질감은 써낼 수 없다.


오늘은 쿵(북)(챙)- 쿵(북)(챙)- 힘차게 끊어지는 소리가 피아노의 선율을 이겼다. 분명 꽹과리니 장구니 여러 소리가 섞여있는데 은근했던 북의 소리가 유독 선명하다. 작년 이맘때 어느 주말엔 마라톤을 위해 경주에 있었다. 9시에 출발이었는데 집결시간은 8시였다. 마라톤 행사에 처음 참여해 보았기에 왜 한 시간이나 일찍 집결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고, 그 시간을 칼같이 지켜 행사장에 갔었다. 9시에 와도 됐을뻔했다. 뛰면 덥겠거니 생각하며 얇게 입은 면티는 가을 아침의 쌀쌀함을 막아주지 못했고, 1시간가량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 1시간을 채운 것은 내빈 소개와 축하 공연, 들썩이는 음악 소리와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렸을까? 기억엔 오늘의 북소리와 닮은 둥-둥- 고동 소리가 들뜸으로 적혀있다. 피부는 차가웠으나 공기엔 열기와 활기가 가득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셔터 소리, 마이크에서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행사 사회자의 진행 소리, 어디로 가면 되냐는 사람들의 들뜬 웅성거림과 축하 공연의 쿵짝거림은 내가 두 손안에 잡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소리는 분명 크기가 없는데, 그날의 소리는 거대했다. 그 속에 속해서 소리가 뿜어내는 열기와 활기를 마음 깊숙이 전달받았다.


그날 내가 감각한 무형적인 것들을 글로 옮기기엔 부족함을 느낀다. 오늘의 소리로 그날의 기억이 연결되었던 순식간의 연결부를 다 풀어낼 수 없다.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 신호들과 나만의 것으로 소화해내 경험한 모든 것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 욕심이다. 첫 번째는 나의 문장이 부족한 탓이고 두 번째는 문자 그 자체가 지니는 한계 때문이다. 내가 쓴 ‘북- 북-’은 북소리의 그것인지 종이 찢기의 그것인지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리의 질감과, 공기의 울림과, 감각이 기억으로 연결되는 순식감과, 그날의 들뜸까지 모두 표현하고 싶어 글이 길어진다. 이것들이 화면 위에서 메마르기엔 아쉽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문장을 연습하는 일뿐이다. 눈앞에 그려지듯, 귓가에 울려 퍼지듯, 더 생생하게, 더 진실되게 알리고 싶다. 그래서 난 오늘도, 감각을 언어로 옮기려 글을 쓴다. 언젠가는 소리의 온기마저 글에서 전해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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