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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음 Mar 23. 2023

그 비닐봉지엔 왜 이름표가 붙었나

엄마와 도시락 배달 자원봉사를 하며 느낀 것


"딸, 혹시 내일 뭐 하니?"


동공이 흔들렸다. 엄마가 내게 '혹시'라는 단어를 붙여 조심스럽게 일정을 물으면 대체로 무언가 부탁하는 상황으로 이어졌기에. 그것도 꽤나 품이 드는 일―이는 필자가 고약한 심보로 귀찮은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자취생이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방문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진정한 휴식과 따뜻한 집밥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허나 디지털 문명에 어둡고, 하고 싶은 일이 무지 많은 어머니를 둔 외동자식일 경우엔 조금 다르지. 엄마는 디지털 기기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모아뒀다가 내가 오면 마치 기다린 듯 하나씩 요청하곤 했다. 아유 벌써 피곤하네.


"왜요? 내일 간만에 좀 쉬려고 했는데"


심술이 잔뜩 밴 말투로 질문에 답했다. 이틀간 외주 업무 마감이 몰린 탓에 잔뜩 예민한 상태였다. 그런데 집에 오자마자 채 2시간이 안 되어 '요청합니다' 시동을 켠다고? 너무하잖아!


"너 내일 나랑 봉사 가자"

"봉사? 갑자기?"

"응, 엄마 늘 가던 거 일손 좀 필요해서"

"그래요"

"웬일이야? 너 늘 집에 오면 피곤해하잖아. 사실 물어보기 전에 엄청 고민했어"

"좋은 일 하자는데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난 또 서류 작업 시키는 줄 알고 긴장했잖아"

"참 고맙네"


엄마는 2021년 1월부터 꾸준히 자원봉사를 해왔다. 매주, 혹은 격주로 지역 사회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도시락 및 밑반찬을 배달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관 주관의 활동이었다. 자원봉사 분야는 크게 조리와 배달. 자원봉사자가 매달 2회 이상 정기적으로 밑반찬을 제조해서 복지관으로 전달하면, 또 다른 자원봉사자가 주소지로 전달하는 식이다. 정확한 요일과 시간에 만들어진 음식이 복지관을 거쳐 수령인에게 제때 도착해야 했다. 과정은 단순해 보일지라도 이는 곧 수급자의 생계와 직결됐다. 즉 책임감과 진정성이 필요한 일.


여기서 우매한 질문. 컬리나 SSG 쓱배송, 배민 B마트처럼 모든 식재료를 원하는 시간에 빠르게 배송받을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구태여 문 앞까지 직접 반찬을 전달한다고? 팬데믹 때도 자가격리용 생필품과 음식이 집 코앞까지 배달되지 않았냐고? 사회 취약계층은 대체로 노년층과 장애를 가진, 혹은 거동이 어려운 1인 가구가 대부분이었다. 청년인 나조차도 애플리케이션에 쩔쩔맬 때가 많은데 이분들이라고 다를 리가. 그리고 당신은 냉동식품만 먹고 평생 살 수 있을지 반문해 보라.


다음 날 보람찬 하루를 위해 이른 점심부터 엄마와 사회복지관으로 향했다. 운전 잘하는 엄마차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몸통과 눈꺼풀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돈 주는 직장 출근길 걸음도 천근만근인데 금전적 보상 없이 오직 선한 마음으로 행하는 발길이 가벼울 리 만무했다. 게다가 나는 잠이 부족한 상태라고! 돌이켜 보니 사회봉사는 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자발적인 봉사를 한 적이 있었나 싶다. 학생 때는 스펙을 위해, 학점을 위해, 졸업 요건을 채우기 위해 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따지고 보면 오늘도 엄마의 부름에 붙들린 셈이지만.


이동길에 엄마와 아주 사소한 일로 말씨름을 벌였다. 맞다. 나는 좋은 일하러 가면서 부모님한테 바락바락 대드는 싹수 노란 딸이다. 미운 말은 어찌나 입에서 쉽게 새어 나오는지.



복지사님은 트레이에 배달해야 할 검은 봉지를 잔뜩 담아 왔다.



복지관에 도착하자 60대로 추정되는 선량한 인상의 복지사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희끗한 머리, 아담한 체구,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한 하늘색 체크 셔츠가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복지사님, 우리 딸이에요. 오늘 하루 도와주러 왔어요"

"안녕하세요, 일일 보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복지사님은 이름표가 달린 열댓 개의 검은 비닐봉지를 건넸다. 자원봉사자의 손맛이 담긴 도시락통과 각종 간편 조리 식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거기에 엄마가 마트에서 사 온 우거지 된장국까지 더하니 꽤 괜찮은 구성이었다. 복지사님은 오늘따라 유독 짐이 무겁다며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전했다.


수령인 성함과 배달 주소지가 적힌 리스트를 확인하니 특이한 점이 있었다. 배송지 옆에 괄호, 다시 말해 부연 설명이 붙은 주소지가 많았다.―삼거리 건강원 뒤편, 00식당 아래 골목 나무 대문, --학교 등지고 우측 첫 골목, --아파트 뒤 오르막 산길, ---씨네 댁 가는 길 비탈길 직전―. 복지사님이 작성한 섬세하고 구체적인 설명이었다. 오직 주소지만으로 설명이 부족한 집이었을까.



오늘 방문해야 할 주소지는 총 12곳이었다. 한 곳씩 방문할 때마다 체크 표시!



오늘의 미션. 티맵에 주소지를 검색한다. 이름이 적힌 검은 봉지와 주소지가 정확히 들어맞는지 재차 확인한다. 문 앞에 검은 봉지를 둔다. 수령인이 문 앞에 미리 꺼내둔 도시락통을 회수한다. 주소지에 제대로 배달했다는 사진을 남긴다. 이 모든 일은 조용히, (은밀하게?) 비대면으로 이루어진다. 코로나 이후 이렇게 바뀌었단다. 다만 배달 수령인 가운데 시각장애인도 계셨기에 그분에게는 대면 배달로 진행했다―이는 혹시나 수령인이 음식을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함이다―간단하지만 번거로운 일이었다. 효율적인 이동 동선을 찾아야 했고 중간에 끼니를 챙기거나 볼일을 보기에도 애매했다. 건강원 인근의 집에 방문했을 때는 개(일명 집 지키는 강아지)가 맹렬히 짖어서 시간을 지체하기도 했다. 언덕을 오르고 올라, 계단을 오르고 올라야 하는 집도 있었다. 헥헥.


12시쯤 시작한 봉사를 5시쯤 마쳤다. 12곳 방문한 것 치고 빨리 끝났네. 엄마의 능숙한 운전 솜씨와 다년간의 봉사 경력 덕이었다. 나로서는 도통 가늠조차 안 되는 '골목 나무 대문 안' 같은 공간을 금세 찾아냈으니. 엄마가 달리 보였다. 배달을 무사히 마치고 복지관에 복귀해 도시락통을 대거 반납했다. 몇 달 치 도시락통을 한 번에 내놓은 집도 있어서 개수가 꽤 됐다.


복지사님이 엄마와 나를 안쪽 회의실로 안내했다. 복지사님과 가벼운 티타임을 가졌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수다 떨 체력이 없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오늘 정말 힘드셨을 거예요. 덕분에 얼마 만에 여유 있는 목요일이었는지"

"뭘요~ 맨날 하던 일인데(넉살 좋게 엄마만 대답)"

나: (조용히 웃음)



회수한 도시락통



"오늘 어떠셨어요?"


복지사님이 내게 물었다. 사실 이 질문은 어쩌면 물어보실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다. 오늘 봉사를 다닌 내내 스스로에게 자문하기도 했으니까. 이전에 안 했던 행동을 했다고 꼭 어떤 감정을 느끼고 감상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그런 날 있지 않나? 뭔가 감상에 젖고 싶은 날. 오늘이 그랬다. 기력도 바닥이고 집에 서둘러 돌아가고 싶었지만, 막상 운을 떼니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복지사님은 나와 텐션이 정말 잘 맞는 분이었다.


봉사를 다니며 관찰했던 마을의 장면, 유독 방문이 고생스러웠던 집에 대한 경험담, 대면으로 전달하는 경우는 어떨 때인지 등 짧은 시간에 다양한 얘기를 나눴다. 그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도 많았다. 수령인 중 요리가 어려운 기면증 환자가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 경우 불규칙적으로 한순간에 심한 졸음이 몰려오는 질환이라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거나 불을 이용하기 어렵다고 말씀해 주셨다. 가스불을 켜고 갑자기 잠들면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또 도시락과 반찬을 배달하며 도시락통을 수거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수령인이 식사를 잘했고, 생존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덧붙여 배달 봉사가 중단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하셨다. 수령인이 타 지역으로 전출한 경우, 사망했을 경우. 수령인이 대부분 1인 가구임을 고려하면 배달 과정은 생사를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일이 필요하구나, 새로운 세계였다. 단순히 음식을 만들고 전하는 일이 아니었다. '보람'이나 '뿌듯함'이라는 단어로 치장할 수 없는 선한 의지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배달지 언덕길 기가 막힌 전경. 온 동네가 한눈에 시야에 들어오는 집이었다.



대화를 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복지사님께 마지막으로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아 그런데요, 왜 봉지에 이름표가 붙어 있나요? 어차피 같은 도시락 아니에요?"

"개개인 체질에 맞춘 메뉴를 전달해 드리거든요. 자원봉사자 분께도 개인에 맞춰 제조해 달라고 말씀드리고요. 수령인이 대개 고령자거나 병환이 있으시니 염도나 당도를 조절하는 거죠. 이를테면 당뇨병이 있으신 분께는 최대한 당도가 낮은 음식 위주로 전달하는 식으로요. 그래서 이름표가 필요해요. 누구한테 어떤 봉지가 전달되느냐가 중요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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