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를 담는 창
때는 재작년 겨울, 12월 말. 크리스마스쯤이었다. 내가 고시원에서 오피스텔로 이사한 날. 날씨가 몹시 추워서 손이 찢어질 듯 아팠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한 달 중 가장 추운 날이었을 것이다. 이사 견적 앱으로 선택한 기사님이 이른 오전부터 다마스를 끌고 왔다. 이사는 오전이 국룰이니까.
"앞인데요. 어디 계세요?"
"3층 옥상이요. 재떨이 있는 곳 맞은 편 방인데요. 올라오시면 돼요."
50대로 추정되는 부부가 목장갑을 끼고 각종 장비를 챙겨 왔다. 합이 좋은 짝꿍처럼 알아서 척척. 보기 좋았다. 오늘 내 이사를 완벽히 도와줄 것만 같은 그림.
"제가 짐을 싸 뒀는데 아직 좀 남았어요. 옮기고 계시면 하나씩 정리하고 있을게요. 근데요, 혹시 남는 상자 좀 있을까요? 좀 빌려(나눠)주시면 안 될 까요?"
그렇다. 자취생에게 거대한 상자란 귀한 것이지. 이사 전날 큼직한 종이 상자를 구하러 다녔지만, 상태 좋은 녀석을 못 구했다. 심지어 쿠팡에 로켓배송이라는 서비스가 있는데도 말이지. 폐지 수레를 끄는 분께 웃돈 주고 종이 상자를 구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수상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일까?
"고시원이라고 해서 짐 별로 없을 줄 알았더니 짐이 왜 이렇게 많아요(웃음)? 옷이 반이네 아주"
"그러니까요(멋쩍게 웃으며)"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부부와 함께 이삿짐을 옮겼다. 차도 없고, 부모님 찬스를 쓰기엔 나이가 좀 많다고 생각했다. 알아서 한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손은 왜 이렇게 시린지. 이 작은 방에 짐이 왜 이렇게 많지. 내가 다 들였다고? 이상하네.
집을 나서기 전, 연말 분위기에 취해 밤마다 소음을 냈던 얼굴도 모르는 옆방 사람의 문 앞에 초코 쿠키를 두고 나왔다. 무려 허쉬. 그는 고시원의 방음이 얼마나 취약한 지 전혀 모르는 듯 떠드는 이였다. 내가 방문을 두드리며 "제가 내일 출근해야 되는데 그쪽 덕에 며칠째 잠을 못 자요.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라는 경고를 날리기 전까지(그는 방에 있는데 없는 체 했다. 다음 날부터 쥐 죽은 듯 조용해졌지). 부부의 다마스를 얻어타고 이동하던 길. 거리는 연말 분위기를 입고 반짝이고 있었다. 새롭게 맞이할 집을 상상하며 잔뜩 들뜬 기분이었다. 아, 부자 된 기분이네.
사실 이사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직장인들이 많이 사는 고시원에 살았고 관리가 잘 되는 편이라 꽤 쾌적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집에서 잠만 자니까. 회사와 한 정거장 거리. 야근하고 걸어서 집 들어가기도 딱이야. 저녁에 누워서 보는 드라마는 어찌나 재밌는지? 내가 이러려고 월세 내지. 그런데 하루는 잠들려던 차 바로 옆 건물에서 불이 났다. 살면서 처음 맡아본 진하고 매쾌한 냄새, 그리고 직접 본 가장 큰 불. 소방차가 최소 6대 이상, 아니 8대였나. 좁은 골목에 경찰차까지 와서 소란도 이런 소란이 없었다. 소방차에서 나오는 강력한 물줄기로 불은 순식간에 꺼졌다. 하지만 삽시간에 옮겨붙는 불의 무시무시한 속도를 눈으로 확인했다. 우리 건물로 옮겨 붙었으면 무슨 수로 살아남았을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한 달이 넘도록 까맣게 타서 녹아내린 건물 일부를 출퇴근길에 봐야 했다. 기분 별로네. 빨리 이사 가야겠다. 마침 회사 동료가 살던 오피스텔 집을 비우고 이사간단다. 그 집은 딱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집이 내 집이 될 줄이야.
"도착했어요. 아가씨 갑자기 삶의 질이 좋아졌네요? 내가 다 안심이 된다."
"저도요. 이게 성공한 느낌일까요?"
실평수 6.5평이랬나. 빌트인 완벽. 게다가 주조색이 흰색이야. 어떡해? 창도 크고 층고가 높아서 시야도 탁 트이고 볕도 잘 들고 좋네. 원룸이어도 너무 좋다. 이 넓은 공간을 언제 다 채우지? 여기라면 내가 마음껏 꾸밀 수 있을 것 같아.
서울살이 제2막이 시작된 참이었다.
창가에 테이블 두고 사는 게 꿈이었다. 온라인 리빙 플랫폼의 세컨드마켓에서 살면서 가장 비싼 가구를 구매했다. 소원성취랄까. 일시불로 결제하면서 손이 덜덜 떨렸다. 이거 진짜야? 이거 다 출금되는 거야?
후회는 없었다. 바라만 봐도 행복한 사물을 잘 쓰기까지 했다. 최소 10평대에나 어울릴 것 같은 6인용 테이블. 조금 크기가 큰데 싶다가도 손님을 맞을 땐 제격이었다. "너 잘해 놓고 사는구나"라는 말도 종종 들었다. 사실 그냥도 너무 좋았다. 이 집에서 처음 맞이하는 봄, 연차를 쓰고 회사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다가 책도 읽고 별 풍경도 없는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본 날. 뭐지, 내 것이 아닌 삶 같잖아. 내게 주는 선물 같았던 하루.
공간에 큰 가구를 들인 후 점차 작은 가구와 소품을 채웠다. 목돈을 모아 스피커도 구매했고 조명도 샀다. 역시 일시불로 결제했다. 가난할지라도 가불 따위 없는 삶을 살고 싶으니까. 고시원에서 데려온 우리집 유일한 식물인 고사리의 몸집이 점점 작아졌다. '가장 키우기 쉬운 식물이라면서요…선생님‘
이후 나는 고사리가 강한 햇볕에 무척 약한 생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짝 타버린 고사리 잎은 내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가엾은 녀석. 우리집이 아닌 다른 집에서 부지런한 식집사를 만났다면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저층이라 사생활 보호가 안 되는 편이다. 이 사실을 살고 나서야 깨달았다. 창가에 걸린 은행나무뷰를 보고 이 집을 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낭만에 미친자랄까. 내내 기다렸지만, 너무 짧았던 장면. 샛노랗게 물든 잎이 창 너머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풍경. 보기만 해도 가슴 뛰는 순간.
그동안 이슈가 있었다면 내가 퇴사를 감행했다는 것.
오피스텔에서 다시 맞은 겨울은 몹시 추웠다. 회사에서 누리던 난방이 얼마나 그립던지. 창이 큰 만큼 외풍도 거셌다. 창가에 앉아서 무언가를 하는 일이 줄었다. 의뢰받은 원고 작업을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아, 정말 좋다. 바깥은 왜 이렇게 예쁜지. 나만 보기 아까운 장면이네. 문득 이 집에서 사계절을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계절을 담은 사진이 있을 테니 글을 써서 함께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집과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언젠가 더 넓고 근사한 집으로 이사를 하더라도 고시원에서 이 집으로 왔을 때의 마음, 하나씩 집에 물건을 들이며 취향에 맞는 인테리어를 완성하는 기분, 계절마다 다른 감정을 선사하는 창 너머의 장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 집에서 몇 번의 계절을 다시 보낼지 모르겠지만,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도 이 공간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앞둔 날들을, 몇 번을 맞이할 계절을 오감으로 느끼며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