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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음 Jan 28. 2024

자극과 반응 사이 공간 만들기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최근 29년 차 기자 김지수의 저서 <위대한 대화>에서 인상 깊은 글을 읽었다. 이 책은 다양한 업계의 전문가 18명의 지혜를 집약한 인터뷰집이다. 여러 인터뷰이 가운데 작가 도리스 메르틴Doris Martin의 말이 유독 와닿았다. 감정은 급행열차와 같으니 조심하지 않으면 그것에 압도될 수 있다며, 모든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을 만들면 자극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보다 더 탁월한 반응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김지수는 2022년 윌 스미스가 오스카 시상식장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부적절한 폭력으로 물의를 빚었던 것을 예로 들었다. 윌 스미스는 시상식 중 아내의 탈모증을 민머리에 빗댄 크리스 록의 도 넘은 농담에 격분해 그의 뺨을 때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이 상황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됐고 세계 각국의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후 윌 스미스는 크리스 록에게 공개 사과를 했고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자진 사퇴했다.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시상식에 10년간 참석하지 못하는 중징계를 받았다. 그는 특정 분야에서 정점에 달했음에도 순간의 분노로 자제력과 평정심을 잃은 결과 불명예를 피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차곡차곡 우수한 필모를 쌓아온 그의 이력이 참으로 덧없이 느껴져 안타까웠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폭력이 정당화될 순 없지만, 솔직히 뺨 때린 윌 스미스 심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화날 때마다 주먹 휘두르고 총기 난사하면 무정부사회랑 다를 바 없겠지.)


최근 나 역시 감정적으로 격변의 시기를 겪었다. 인간관계도, 사회생활도 어느 하나 쉽지 않았다. 꽤나 잘해왔다고 믿었던 것에서 틈이 생기고 기포가 일며 터지니 족족 반응하고 있었다. "내가 멍청한가?"라는 무의미한 질문을 친구에게 던지기도 했다. 돌아오는 답변은 역시나 그렇지 않다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분출하기보다 삭히는 타입이라는 점일까? 스스로 완벽하지 않은 인간임을 깨달으며 내 현황을 돌아보게 됐다. 자아 성찰, 자기 돌보기 뭐 이런 종류의 조금 쑥스러운 단어가 적합하겠다.


우선 인간관계. 손 뻗으면 잡아줄 친구가 분명 있다.하지만 내가 도움을 청할 준비가 되었는지, 반대로 상대에게 마음 쓸 여력이 되는지는 다른 문제다. 전자도 후자도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러려면 건강한 마음 상태를 갖추고 재정적으로 최소한의 기반을 닦아놔야 한다. 요새는 "별 장치 없이도 이어지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가까워져 보고 싶어도 삐걱거리는 사람이 있다"는 친구의 말을 지침으로 삼고 있다. 나는 지난해 '관계라는 것은 비울수록 더 꽉 매듭지을 수 있다'라는 문장을 기사에 쓰기도 했다. 올해는 상대에게 바라는 것보다 해줄 수 있는 걸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회생활은 정답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처한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늘 초심자 같은 마음으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것을 내 세계로 받아들일 유연함과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를 대비하는 자세. 무엇보다 스스로 불안정하고 모자란 사람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며 보다 나은 결과를 완성하기 위해 방심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일터에서 존재를 증명하려고 절박했던 순간을 다시금 상기했다.


나는 불안하면 손발이 저리고 정신이 아찔해진다. 하지만 멘탈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감정을 해갈하는 법을 안다. 차분히 독서하고 글을 쓴다. 따뜻한 차나 커피를 마시고 달달한 디저트를 왕창 먹어치운다. 위스키와 맥주를 들이킨다. 종종 자전거를 타며 속도감을 즐긴다. 오늘은 노트북을 챙겨 카페에 나섰다. 폭신한 초코 시트와 크림이 어우러진 티라미수 롤케이크에 매화향 머금은 자스민차를 곁들였다. 거울을 보며 죽상도 풀었다. "땅 꺼지게 들숨날숨 내쉬는 꼴이 무슨 일 있나 본데 한숨도 버릇된다"라는 엄마의 일침도 떠올렸다. 맞다. 감정도 옮는다. 근심과 설움을 드러내는 건 다른 이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테다.


선배가 쓴 '부서진 마음을 치유하는 곳'이라는 문장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런 사람이 글을 쓰는 거구나, 생각했다. 오늘 내가 부서진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택한 것은 글이다. 부정적인 자극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면 감정이 끓어오르기 전에 뜸 들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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