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료 4잔 마시며 나눈 대화
철 바뀌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침대에서 몸뚱이를 일으켰어요. 오늘 아니면 다음 계절에 보겠군 하면서요. 좋은 곳 새로 생기면 가자고, 재밌는 거 있으면 가장 먼저 하자고 제안해 주는 소중한 친구입니다. 한두 살 나이 먹을수록 무언가 시도하는 데 기회비용을 먼저 셈하게 되는데, 이 친구는 그런 걱정마저 사르르 녹여버리는 달콤한 제안을 던져 옵니다. 제가 그걸 덥석 물 용기만 있었다면 이미 우리 프로젝트는 한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취향부터 관심사, 가치관까지 비슷한 이 친구의 아이디어샘이 앞으로도 마르지 않기를 기대해 봅니다(내가 한 번 떠먹게).
외출 준비는 간략히. 대충 날씨도 좋아 보이니 드라이는 생략하고 빗질만 합니다. 햇살 아래 잰걸음으로 걷다 보면 자연건조 되거든요. 얼마나 좋습니까? 불경기에 전력도 아끼고.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는 딱 필요한 외출용 그루밍만 해주면 됩니다. 재스민 향수 챱챱. 몸에 두르고 옷깃 한 번 팡팡한 후 신나게 약속 장소로 출발~ 새로 산 무선 이어폰을 착용해 세상 소음으로부터 날 분리시킵니다. 밤양갱~ 내가 바란건 다디단 밤양갱이야아~ 내적 흥이 오를 때쯤 지하철을 탑니다. 오늘은 이달 첫 약속날입니다. 골골거리던 월초와 달리 에너지가 솟습니다. 갤러리와 카페. 너의 선택은 늘 답안지 같습니다. 주관식 답안지라면 백점을 주고 싶습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안목. 네 취향이 곧 내 취향이라는 사실을 우린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첫 행선지는 이태원에서 연 패션 포토그래퍼 5인의 전시입니다. 손바닥 사이즈의 사진을 쭉 나열해서 전시하는 방식이었는데, 공간이 비어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시의 묘미는 사진 하나하나를 뜯어보는 데 있더군요. 총 5인의 포토그래퍼가 촬영한 사진을 어떤 순서로 어떤 사진 옆에 배치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달까요. 사진 한 장 들여다보다가, 좌우로 시선을 확장하면 배열에 의도가 담겨 있는 건 아닐지 추측하게 됩니다. 색감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고요. 특히 사진 뒷면에는 참여 작가 5인의 정보를 노랑, 초록, 하양 등의 색상의 원형 스티커로 구분해 붙여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눈길이 가는 사진을 뒤집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업 스타일과 선호하는 감도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간 음향 너무 좋았음. 음악 연출은 동선이 짧은 공간에 더 오래 머물게 하는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전시 플레이리스트에 감탄하며 음악 세 곡을 더 듣고 나왔습니다.
한참 걸어서 해방촌 어딘가의 카페에 둥지를 틉니다. 우리 대화 주제는 과거부터 현재, 미래, 어떻게 살 것인가? 이놈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건 얼마일까? 등 매우 다양합니다. 서로 어떤 말을 해도 밉살스럽게 보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는 사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한 자리에서 4시간은 머물며 2잔의 커피와 2잔의 차를 먹어치웠습니다. 아마 뒤에 계시던 바리스타분의 귀에서 피가 철철 흘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는 우리에게 "한라봉 좋아하시나요?" 합니다. 그럼 또 우린 "그럼요"하지 않겠습니까. 먹거리와 함께 엔틱하면서도 모던한 포크 두 개를 제공받았습니다. 에너지를 재충전한 우리는 다시 내일 없는 사람들처럼 수다를 쏟아냈습니다.
말 많이 해서 현기증 날 때쯤 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카페와 이어진 계단 아래의 편집숍 겸 갤러리로요. 멋쟁이 흰 더비부츠에 진보라 양말을 신은 민머리 사장님이 공간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하더군요. 그는 사람 잘못 골랐습니다. 우리는 판이 없어도 말하고, 깔아주면 더 잘 말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대화는 멈출 줄 모르고 이어졌습니다. 대표님의 사업 구상 배경부터 큐레이션 한 각 제품들에 대한 이야기, 공간 운영 방향 등을 개괄적으로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천성 이야기꾼이었습니다. 재밌는데? 못 참고 대표님 스타일이 딱 매체사가 좋아할 스타일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이놈의 입. 사람을 협력 대상 내지 미래의 인터뷰이로 상상하는 버릇은 이제 고쳐야겠습니다. 그냥 재미나게 수다 한바탕 떨면 되잖아! 뭐가 그리 어렵니.
최근 생산적인 것이 아닌 행동은 무용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피로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투잡이나 취미생활로 일상을 빼곡히 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동기부여 멘트와 함께 알고리즘에 떠다닙니다. 근데 부지런히 쓸데없는 거 하는 사람은 안 껴줍니까? 브런치로 일기 쓰기라던가 이불 덮고 생각에 잠기기(자는 거 아님) 같은. 이런 누구나 당장 실천 가능한 일은 갓생으로 안 쳐주냔 말입니까!!!
오늘은 정말 아무런 글이나 쓰고 싶어서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내일보면 발로 썼나 싶어 경악할 수도 있겠군요. 대충 힘 좀 빼고 살라는 동료의 말에 귀 기울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