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 오직 정공법만 아는 여인의 위기
사회생활 N연차. 이제 막 주니어 탈을 벗기 시작할 무렵 세 번째 직장에 입사하며 위기를 맞았다. 그 이유는 바로 내게 필요한 업무 역량이 다름 아닌 '재미'였기 때문. 매사 콘텐츠에 진심은 담아도 재미는 해당 사항 없었는데. 나는 유전자부터 노잼 FM 인간인데 어쩐담.
물론 내 캐릭터에 유잼이 전혀 없지는 않다. 개그코드가 잘 맞는 사람은 내 솔직하고 엉뚱한 면을 흥미로워한다. (좀 귀여워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내 지난한 성장 일대기를 옆에서 지켜본 선배에 의하면 마냥 천사 '같았던' 00씨가 사회화되며 냉소가 생겨 웃기단다. 예를 들어 전사 메일에 '가족 같은~', '~식구들'이라는 워딩을 보면 우스갯말로 "가족이면 가족답게 대우해 달라"고 할 정도의 거리 두기가 가능해졌달까. 불과 작년만 해도 일이 곧 나였고, 회사가 집보다 익숙한 곳이었기에 업무 하나로 하늘이 무너졌다 솟았다 했는데 말이지. 이렇게는 롱런이 불가하겠단 판단 하에 하드디스크를 업데이트하게 된 것이다. 이름하야 직장인 2.0 버전이다.
내 삶의 모토 중 하나는 못할 거 없다는 거다. 안 되면 되게 하고, 정 안 될 것 같다면 흉내라도 내보자는 주의다. 아직 관리자가 아닌 터라 성과도 중요하지만 시도해 보는 데 좀 더 의의를 두게 된다. 매달 전혀 새로운 주제로 책 한 권을 뚝딱 만드는 일을 하면서 무언의 자신감이 생겼다. 실제로 올해 디자인 전문 분야 중에서도 특화된 분야에 대한 글쓰기를 하면서 경험의 역치가 쌓인 덕도 있다. 이 프로젝트를 이끌며 디자인 팀장님, 편집장님, 그리고 수십 년 책의 교정을 맡아 온 선생님에게까지 "훌륭하다"라는 평을 들었다. 마라맛 피드백을 수시로 받기 일쑤였던 초반과 달리 매듭은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퇴사하고 편집장님께 외주 원고 제안받았을 때는 왠지 인정받은 기분이라 어찌나 기쁘던지! (사실 급해서 연락한 듯)
그래서 새로운 업무 환경을 만나도 무서울 게 없으리라 생각했다. 쫄지 말자. 사회생활 다 거기서 거기니까. 뭐 이런 마음가짐으로. 예상은 했지만 일주일 새에 과다한 정보가 내 안에 쏟아졌다. 새 조직에서 인수인계와 온보딩이 이루어지며 각종 내부 관리자툴, 글로벌 광고툴과 디자인툴, 새로운 메신저 사용법 등을 익히고 적응해야 했다. 경력직은 알잘딱깔센 해야 하는데 마치 인턴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특히 나는 디자인 전공자로서 흔치 않게 학부 시절부터 윈도우를 고집해 왔는데 갑자기 맥 노트북을 지급받아 새 인터페이스에 적응하느라 진을 뺐다. '아니 무슨 캡처 하나 하는데 손가락을 닭발 모양으로 해야 한담? 영어 대문자 설정하는 건 왜 이렇게 불편해!' 했지만, 모르는 건 검색하고 사방팔방 물어보며 더듬더듬 익히니 또 못할 건 아니었다.
근데 문제가 생긴 거다. 앞서 밝혔듯 내게 필요한 업무 역량이 '유잼'과 '트렌디함'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전까지 매체사에서 일했던 터라 정보의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각종 분야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걸 콘텐츠화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요새 세상 어떻게 돌아가나 살피게 된다. 근데 그게 트렌디함과 직결되진 않는다. 그리고 나는 자타공인 차분함의 대명사다. 내 얕은 식견과 편견을 바탕으로 한 데이터에 의하면 차분한 사람은 대체로 은은한 광인이거나 노잼이다. 자기 객관화가 잘 된 사람으로서 나는 명백한 후자다. 둘 다일수도.
물론 면접 때도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가 필요한 건 유잼 트렌디 인재인데 당신은 어떤 편이냐는 질문에 솔직히 학습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은연중에 내 개그코드는 대놓고 요란하게 웃긴 거 말고 침착맨 같이 뻘하게 웃긴 거라며 TMI까지 술술 불었다. 어쩌다 철썩 붙었지만 면접관들도 나를 두고 반신반의했으리라 확신한다.
엄근진 콘텐츠에서 탈피해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요새 젊은이들은 뭘 좋아할라남?~ 허허. 같은 부장님 코드의 개그를 발산하고 싶지는 않은데. 열심히 말고 타고난 감각도 필요한 게 아닐지 조금 고민이 깊어진다. 나의 회사 생존기는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