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우리는 함께 있을 때에는 정말 우리가 잘 지내고 있거나,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서야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값진 시간인지, 얼마나 소중하게 알차게 지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여행자의 마음과 이민자의 마음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행자로서의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을 다시 한번 흞어본다. 익숙했었던 공간이, 보이지 않았던 부분까지 다시 새롭게 보여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처 눈치채지 못했었던 곳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혹은, 잊혀지지 않을만치 좋았었던 추억이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나올지도 모른다. 반면에, 이민자의 마음은 이 공간에 있는 내가 여전히 이방인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이 공간에 익숙해져서 새롭지 않다. 아니, 익숙하던 익숙하지 않던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환경을 나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나를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해 나를 이곳저곳 늘리고 줄여서 맞추어 간다. 어쩌면, 내가 우리 커뮤니티를 바라보는 마음이 이민자마냥, 익숙해져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언제까지고 우리 커뮤니티가 이어질 것처럼 말이다. 한시적인 공간 속에서(우리의 땅이 아니므로) 한시적인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도, 이것이 계속 이어져나갈 거라고 마냥 믿으면서 앞으로 나갔었던 것일까?
그렇다. 우리 커뮤니티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 거라고는 누구도 얘기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코로나로 인한 잠시 피신처,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처럼 그렇게 달콤하고 꿈같은 시간을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생활들이 정상화되었을 때( 정상화라는 개념이 좀 애매하기는 하다.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소수의 어떤 정신이 번쩍 뜨인 이들에게는 절대 정상이 아닐 수 있으니까.) 과연 우리들의 정착지는 어디일 것인가? 일단, 모든 가족들의 각자 계획들을 들어 보았을 때, 여행자들이었던 우리 모두가 여행에 목이 말라있었다. 그렇기에 여름 시즌이 끝나고 나면, 모두들 가족들을 보기 위해서나, 서류나 여권 등의 문제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 돌아가거나, 일 때문에 다시 런던에 가거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우리의 터전이었던 이곳을 잠시 떠날 것이다. 어떤 이는 돌아올 날짜를 정하지 않고 떠나기도 하고, 우리 같은 경우는 여름 시즌이 어떻게 끝나는지에 따라 여행 일정과 다음 해까지의 계획이 정해질 것이다. 과연 우리 모두가 다시 Arkadia(우리의 커뮤니티의 이름)에 돌아왔을 때에는 또 어떤 생각을 가슴에 품고 돌아올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듯이, 우리 4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있을 날이 약 한 달에서 한 달 반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그 시간이 너무도 짧지만 귀하게 여겨진다.
답이 정해지지 않았던 이 글귀는 약 1년 전에 두리뭉실하고 막연한 각 가족들의 상황 앞에서 휘갈겨 썼었던 것이었다. 약 1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합의된 결론 없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열심히, 순간순간을 막끽하기위해 노력해가며 살아왔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각기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과 비전이 커뮤니티 속 안에서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끊임없이 나 자신과 모두에게 물어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 속에서 어디까지가 자아를 위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타인을 위한 것인지도 다시 물어본다.
또다시 무더운 여름이 돌아왔다. 이 여름이 시작되기 전, 한 가족이 기나긴 여정 뒤에 다시 Arkadia에 잠정적으로 돌아왔고, 다른 한 가족이 일을 하기 위해서 잠정적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른 한 가족이 잠정적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다른 한 가족이 충만한 한 달을 알차게 함께 보내고 가을을 기약하며 떠났다. 아직 우리의 종착역이 어디일지는 모르겠다. 만남이 있었다면 언젠가 헤어짐도 있을 거라는 것을 여행자들은 알고 있다. 인생에서도 언제나 노마딕처럼 장소든 사람이든 헤어짐에 익숙해지자고 나 자신에게 다독인다.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까지 온 힘을 다해서 살다가 죽는 불나방처럼 내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값지고 깨어난 눈으로 잘 살아가자고 다시금 나 자신에게 당부한다.
무더운 한 여름밤, 뜨거운 태양이 지고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고, 귀뚜라미가 짖어대는 한산해진 이 깊은 밤에, 창문 밖을 통해서 텐트를 치고 피자마 파티를 하느라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아이들은 이 피자마 파티를 하기 위해서 일주일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기대에 가슴이 부풀었고, 지금 이 행복한 순간을 위해 거뜬히 무더운 오후를 호수에서 몸을 식히며 기다렸다. 순간순간의 행복함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이 아이들처럼 나도 살아가자고 또다시 내게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