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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엄마 Aug 16. 2021

나는 B급 엄마입니다

절대 A급이 될 수 없는 나라는 인간의 한계

  "엄마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


  자려고 누웠는데 아들이 뜬금없이 말을 건넨다. 순간 가슴이 덜컥한다.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막연하게나마 내가 없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라고 밑도 끝도 없는 걱정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많이 키웠다 싶다가도 여전히 어리고 여린 아이들의 존재가 유달리 자각될 때가 있다. 이제 마흔이 되어가는 나도 가끔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데 10살, 7살인 아이들은 오죽할까.


  감기에 걸려 코를 훌쩍이며 한 말이 마음에 동심원처럼 울려 퍼졌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잘 살까'를 고민했다. 눈앞에 닥친 일과 직장문제, 인간관계, 결혼 생활 등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게 현안이었다. 요즘에는 '어떻게 하면 잘 살아남을까'를 생각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나면, 아이들이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며 살아갈 게 두렵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가야 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내가 훌륭한 엄마는 아니다. 나는 상당히 감정에 취약한 사람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행복하다가도 어질러진 집과 쌓여있는 설거지를 보면 문득 화가 난다. 매일 빨래를 개고, 먼지를 닦고, 장난감을 정리하는 도중 답답할 때가 많다. 해도 해도 티가 안나는 집안일과 치우고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어지럽혀진 집을 보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아이들이 싸우거나, 공부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면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다가 결국에는 소리를 지르고 마는 나약한 인간. 




 

 이게 바로 결혼 11년 차, 엄마 인생 10년 차인 나의 초라한 성적표다.



  사회에서는 10년이면 전문가라고 한다. 엄마로서 10년이면 반전문가가 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점점 자라고,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고, 요구사항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다. 이에 발맞춰 나도 아이들의 새로운 환경을 이해하고, 제 나이에 받는 교육과 교우관계에 신경 써야 하며, 다양한 요구를 들어주려 노력한다. 방점은 노력에 찍힌다. 아이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도, 많은 것들을 제대로 보살펴주지도 못한다. 늘 허점투성이에 숭숭 구멍이 뚫린 나의 허술한 모습이 눈에 밟힌다.


 "하든지 안 하든지 둘 중에 하나지. 그냥 노력하겠다는 말로 대충 넘어갈 생각하지 말아라"


 여자 배구의 신 김연경은 인스타에 이런 명언을 올렸다. 혜민스님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이라는 에세이집에 담긴 문장이기도 하다. 나는 엄마고 이는 10년간 변치 않은 사실인데, 그동안은 그저 닥친 일을 해결하는 데 바빴다. 아이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어루만지지 못했다. 눈을 마주치며 웃고, 땀이 나도록 신나게 몇 번 놀아주지도 못했다. 설거지하니까 잠깐 기다리라고, 너희들끼리 놀고 있으라고, 책 읽고 있으라고 이야기한 내 모습이 뇌리에 스친다. 육아 전문가의 말처럼 아이들이 요구할 때 바로바로 반응을 보이며, 너그럽고 다정한 엄마가 아니었다. 그저 노력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주관적인 말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런 B급 엄마였다.


  때로는 버겁다. 일하는 엄마여서만은 아니다. 다둥이 엄마여서만도 아니다. 마흔이 다 되도록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는 까닭이다. 스스로 불완전하고 미숙한데, 누군가를 챙기고 보듬어 나가는 게 어렵기만 하다. 잠깐의 여유가 생기면 쉬고 싶고, 눕고 싶고, 책이나 음악을 들으며 온전한 내 시간을 갖고 싶다. 해도 해도 티도 안나는 집안일을 놓아두고 보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 끼니때마다 뭘 먹을지 걱정하지 않고, 대충 아무거나 입에 욱여넣고 한 끼 때우고만 싶어 진다.


  어찌 보면 이기적이고, 어찌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나에게 "B"라는 성적표를 매긴 건 순전히 내 이상향과의 괴리감 때문이다. 나도 어떤 엄마가 바람직한지는 알고 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인내할 줄 알며, 상황에 걸맞은 언어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나는 모든 배경지식을 잊은 채,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뒤늦게 후회하고야 만다. 엄마로서의 역할과 내 본연의 본능이 충돌하며 갈등하는 지점이다. 특정 상황에서 초반에는 엄마의 자아를 탑재하고 나긋나긋 행동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상황이 잘 해결이 되지 않으면 원초적 자아를 탑재하고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


  머리로는 A를 지향하지만, 현실은 B에 머무른다고나 할까.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내가 B급이라는 증거일 테다.




 

 이런 간극을 메우는 게 사랑이다. 



  원초적 자아만큼이나 아이들을 향한 나의 모성도 본능적이다. 다투거나 투정을 부릴 때면 화가 나다가도, 아이들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면 화가 금세 사르르 녹는다. 그래서 엄마인가 보다. 신이 모든 곳에 머무를 수 없어서 엄마를 보냈다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아이의 배가 주리기 전에 밥 한 술을 떠주고, 넘어져 다친 무릎에 연고를 발라주는 사람. 공부를 하니마니 씨름하다가도 아이가 조금이라도 성장을 하면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람. 준비물을 잘 챙겼는지 확인하고, 마스크의 줄을 매 주고, 자는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는 사람. 바로 엄마다. 그리고 이게 나의 역할이다.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B급이라도 나에겐 '엄마'라고 불러주는 아이들이 있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도 돌아서면 다시 와서 안기는 아이들이 있다. 나도 좀 우아하게 살아보고 싶다고 외치다가도 돌아서서 생각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흘려보내는 시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게 아닐지. 아이들의 해사한 미소를 보면서, 잠든 티 없이 순수한 얼굴을 보면서 다짐한다. 허술하고 알량한 노력이라도 하자고 말이다.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그저 옆에 있어주는 엄마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나도 조금은 더 괜찮은 B+ 정도의 엄마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도 너 없이 못 살아. 그리고 엄마는 항상 네 옆에 있을 거야."


  잠깐의 고민 끝에 아들에게 이렇게 답해 주었다. 아이를 감싸 안고 토닥이는 이 밤이 따스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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