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와이프가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고, 초등학생이던 첫째와 아직 유치원생이던 둘째가 한창 커가는 중이었음에도, 잘 다니던 직장을 뛰쳐나와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시간'에 대한 절실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업무의 초점이 해외 딜에 맞추어지다 보니, 업무는 실질적으로 24시간 돌아가야 했고, 가족들이 깨어있는 얼굴을 보기 힘들었습니다. 결정적 트리거는 아버지의 투병이었고, 가시는 마지막 길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에 결국 겨우 붙잡고 있던 멘털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속박을 벗어나면 최소한 내 시간의 주인이 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결국 허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쉬지 않고 뭔가를 하는 것 같은데, 여전히 시간은 항상 부족하고, 막상 눈에 보이는 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전에 비해 접촉이 많아진 아이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인터넷 서점을 기웃거리던 중에 이러한 고민들과 맞닿아 있을 것 같은 제목의 책 두 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평균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도둑맞은 집중력>입니다. 이 두 책은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가속하는 기술의 발전과 점점 더 소외되는 인간성의 충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공통적으로 산업혁명을 그 출발점으로 지목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모조리 파괴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공통점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도착하는 지점은 전혀 다릅니다.
저자 Todd Rose는 중학교 시절 ADHD 진단을 받았고, 고등학교에서는 성적 미달로 중퇴했으나, 하버드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로 교육 신경과학 분야에서 굵직한 성취들을 이루어냈고, 지금은 교육 신경과학 분야 싱크탱크 Populace를 이끌고 있는,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저자는 인류에게 전례 없는 풍요로움을 가져다준 산업혁명 이후의 표준화와 대량생산의 패러다임, 그리고 그 기저에 자리한 평균이라는 수학적 도구에 주목합니다. 수학에 대한 거부 반응을 가진 이들에게도 평균은 쉽고 익숙합니다. 저자 또한 평균의 효용성을 인정합니다.
"예를 들어, 각자 다른 그룹에 속한 2명의 개인을 비교하는 것이 아닌, 칠레의 조종사들과 프랑스의 조종사들 간의 실력을 비교하는 경우라면, 이때는 평균이 유용한 역할을 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평균이 어떤 표본이든 하나의 숫자로 정의해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너무 쉽고 명확한 개념이다 보니, 이러한 문제가 인지되기 전에 세상 모든 곳에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저자는 이 쉽고 명확한 기준이 교육이나 인사와 같이 사람을 평가하는 영역에까지 확산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문제를 키워왔으며, 이제는 임계점에 이른 것으로 분석합니다.
"노르마는 유명한 부인과 의사 로버트 L. 디킨슨 박사가 조각가 아브람 벨스키와 합작해 탄생시킨 작품으로서 벨스키가 1만 5천명의 젊은 성인 여성들로부터 수집한 신체 치수 자료를 바탕으로 빚어낸 조각상이었다...당대의 과학자들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디킨슨 역시 대규모로 자료를 수집해 얻어낸 평균치가 중요한 사실을 결정짓는 요소라고 믿었다. 노르마가 바로 그런 신념에 따른 중요한 사실의 상징이었다."
이 '노르마' 조각상을 전시했던 클리블랜드 건강박물관은 노르마 조각상을 이상적 여성상으로 선전했고, '노르마'와 신체 치수가 가장 비슷한 여성을 선발하는 대회까지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9개 항목 모두에서 평균치에 가까운 여성은 한 명도 없었고, 5개 항목으로 한정했을 때 3,864명 참가자 중 40명 정도가 겨우 포함되는 정도였습니다. 즉, 전체 표본을 명확하게 정의해 주었던 평균은 사실 그 표본 안의 어떠한 것도 설명하지 못했던 셈이고, 정규분포 곡선은 허구라는 얘기가 됩니다.
이렇게 평균의 의미를 지우고 나면, 교육이나 인사는 물론 의료, 금융 등 획일적 척도에 의한 평가를 수반하는 모든 시스템의 존재 기반이 흔들리게 됩니다. 단순히 대학 서열의 의미가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대학 교육의 필요성 자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학위 대신 자격증, 속도가 아닌 실력 중심의 평가 시스템, 자율 커리큘럼을 제시하며 끝을 맺습니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어떻게 보면 급진적일 수 있는 관점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피로감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획일적 교육으로부터 소외당했으나 이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해 낸 저자의 경험이 책 전체에 단단한 기반을 제공합니다. 둘째, 문제의 기원과 전개 과정에 관한 학자로서의 연구 성과들이 필요한 곳에 명쾌하게 제시되어 길을 잃지 않도록 합니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교육학자로서의 입지를 유지함으로써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합니다.
저자 Johann Hari는 다양한 논란을 몰고 다녔던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입니다. <인디펜던트>지 기자로 일하던 당시 표절 논란으로 물러나야 했고, 자신을 비판한 내용이 포함된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악의적으로 편집했던 이력도 있습니다. 다만, 그 후로는 비교적 일관된 주제의 글을 펴내고 있습니다.
<평균의 종말>과 같이 배송을 받았지만, 글의 완성도가 대단했던 <평균의 종말>을 먼저 읽었던 탓에 이 책을 읽게 되기까지는 일주일 정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이 책의 내용 전개가 상당히 어수선한데, 그 이유는 책의 주제가, 비록 많은 이들이 겪고 있을 수는 있지만, 결국 저자 자신의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글 자체로서 자신이 제기하는 문제들의 심각성을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다만, 저자는 자신의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굉장히 열정적으로 해결책을 찾아갑니다. 물론, 저자가 여전히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평균의 종말>에서와 같이 깔끔한 결론은 없습니다.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기보다,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지켜보며, 공감하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책입니다.
특히, 저자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찾아본 연구 자료들과 직접 만나 조언을 들었던 전문가들의 인터뷰들은 그 컬렉션 자체로 독보적인 면이 있습니다.
"ADHD는 진단이 아닙니다. 이따금 동시에 발생하는 특정 행동들의 묘사일 뿐이에요. 그게 전부입니다." (사미 티미미, 영국의 아동 정신의학자)
"ADHD를 진단받은 아이들의 절대다수는 ADHD를 타고나지 않는다. 이들에게 ADHD가 나타나는 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반응이다." (앨런 스루프, 미국의 아동 심리학자)
"어린이는 놀이를 할 때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습득한다. 아이들에게서 이러한 도전을 박탈하면, 자라면서 공황 상태에 빠지고 자신이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고 느낄 때가 많을 것이다." (조너선 하이트,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다만, 이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마주한 진실에 너무 흥분한 것이든 전문가의 모호한 입장을 어떻게든 해석해 내야 하는 의무감이든, 성급하게 자의적 결론으로 건너뛰는 경우가 많은 편입니다. 둘째, 교육, 노동, 의료, 기술, 식생활 등 광범위한 영역에 문제들을 제기하는데, 그의 해결책들은 모두 집단적 저항으로 귀결됩니다. 즉, 그가 생각하는 유일한 해결책이 혁명인 셈인데, 거창한 문제제기에 비해 너무 단편적인 결론 같습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들어본 적도 없던 ADHD라는 말을 갈수록 자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어설프게 주워들은 얘기들에 기대어 너무도 쉽게 주변의 누군가가 ADHD인 것 같다는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제 사춘기를 지나는 중인 첫째를 볼 때조차 가끔은 ADHD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를 충분한 설득과 동의의 과정 없이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전으로 밀어 넣은 건 어른들입니다. 즉, 기껏 하나를 진득하게 붙잡고 있기 어려운 환경에 밀어 넣어놓고, 지금은 진득하게 붙잡고 있는 게 없다고 불평하며, 뭔지도 모르는 ADHD로 진단까지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돈을 아끼고 모아서 아이들을 댄스 수업에 보내요. 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것은 아이들에게 주지 않아요." (리노어 스커네이지, 미국의 육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