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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윤호 Jun 03. 2023

[수필] 온실 속 화초의 학습된 무기력

20230603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결과에 무기력해한다. 이 결과가 반복되면 결국 자포자기하는데, 이 현상을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한다.


  세상 살아가는 것을 '운칠기삼'이라고 하는데, 이는 삶의 변화는 '운이 거의 전부'면서도, '3할의 의지와 재주로 좌우된다'는 뜻이다. 만약 개인의 모든 것이 운에 좌우된다면 개인은 무의미해진다. 무의미에 다가갈수록 개인은 무기력해진다. 도박 중독과 향락에 빠지는 이유는 3할의 의지와 재주만으로 전혀 변화하지 않는 반복되는 환경 때문이다.


  무기력은 '빈곤한 환경' 속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풍족한 환경'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온실 속 화초는 과연 무기력하지 않을까? 온실 속 화초는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모든 것이 충족된다. 씨앗이 뿌려지고, 물이 받아지고, 태양이 쬐어진다. 자신이 숨 쉬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적절한 온도 속에서 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초는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곧, 화초는 어떠한 것도 도전하지 않는다.


  혹자는 '자식을 오냐오냐 키우면 안 된다'는 말을 '사랑을 주지 말고 엄하게 키우라'고 해석하여 체벌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잘못된 해석이다.

 사랑은 풍족하게 주더라도, 개인이 노력하여 쟁취의 성공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 개인이 도전하는 걸 두고,

  "아, 위험해. 그거 하지 마. 내가 대신 할게."

 라고 한다면 개인은 어떤 것도 도전할 수 없다. 아무리 풍족한 환경일지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개인은 과연 무기력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실존주의 성격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점차 자동화되는 환경 -자신의 의지가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 속에서 인간이 의미를 가질 공간은 점점 좁아진다. 수없이 많은 존재는 여기저기 흩뿌려져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도전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환경이 될지라도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학습된 무기력' 속에 변명할 수밖에 없다.


  빈 라덴을 제거한 전설적 미 해군대장인 맥레이븐은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스스로 이불부터 개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스로 이불을 개지 못할 정도의 무기력증 환자도 있다. 이러한 무기력증은 개인을 타박해서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에게 크나큰 독이 되어, 잘못된 의지-삶을 포기하는 의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과 같은 소규모 공동체부터 국가 단위의 사회까지 개인에게 조금이나마 자그마한 도전 기회들을 슬그머니 건네야 한다.


  물론 기회를 제공하는 이도, 제공받는 이도 큰 기대는 하지는 말자. 기대는 이들 모두에게 실망, 절망, 무망을 만들어 낼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기력한 환경에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저 더불어 살아갈 뿐이다. -이는 '인간 개인의 노력만으로 기본권을 달성할 수 없기에 존재하는 제도'인 '사회복지'의 주된 이유와 유사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힘이 다 빠진 체 무기력하게 누워있다. 나 역시 내 의지대로 되지 못한 환경 속에서의 '학습된 무기력'이 내 생활을 조인다. 쓰러진 베개 밑에서 두 메시지가 솟구친다.

 '이제 더 이상 도전하는 게 무서워.'

 '실패하더라도 내 꿈의 방향을 놓칠 수 없어.'

  내 머리를 관통한 두 메시지는 매일매일 지끈거리게 충돌한다. 나는 오늘도 선택하고 도전하고 또다시 쓰러지고 일어서며 의미를 찾으러, 인간이 되기 위해, 그저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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