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분홍숲 Nov 23. 2022

이별을 고한 자의 변명

뭐라고 써야 할지 막상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네. 분명히 너한테 할 말이 무지 많았는데 말이야.


참, 며칠 전 문 앞에 두고 간 토마토는 잘 받았어. 고마워.

그 토마토 먹으면서 니 생각하라고 그랬지? 만약 그렇담 성공했어.


근데 뭐, 그거 말고도 널 생각나게 하는 게 지척에 널렸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깨는 내가 매일 새벽 켜고 끄는 거실에 둔 스탠드며, 냉동실에 가득 들어찬, 네가 넣어둔 반찬거리들이며, 길 가다가도 발에 채이듯 너무나 쉽게 보이는 너와 함께 갔었던 식당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건 난생처음 해본 탈색과 시크릿 투톤 염색이 된 내 머리카락까지…


처음 며칠은 태어나 처음 들어본 나를 향한 그 욕설과도 같은 말들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괴로웠어. 그날 우리 집에서 6시간 동안 나에게 쏟아부었던 그 응축된 감정의 결정체들. 태어나 처음 맞닥뜨려보는 누군가의 분노와 원망이 나는 익숙지가 않았어. 너무나 낯설고 차가웠고 따갑고 아팠지. 그런데 그 고통이 너의 고통보다 크거나 같았을까?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 그랬기에 외면하고 싶었어. 그리고 그 크기를 짐작도 감당도 할 수 없기에 공포스러웠어.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하며 죽음의 공포까지 느꼈었지. 그래서 경찰을 불렀어.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마지막을 그렇게밖에 맺을 수 없었던 나를 용서해줘.


그날 경찰들 앞에서 들렸던 너의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아직까지도 들리는 듯 해. 처음엔 그 소리의 의미가 뭔지 알 수 없었어. 그러다 점점 그 파동이 가슴을 울리고 뜨거운 눈물이 돼 솟구치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난다는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행복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지?

축하해.

나 전혀 행복하지가 않아.

감흥이 없어. 점점 더 무감각해지는 것 같아. 눈물이 자꾸 나는데 내 눈물의 의미를 나도 몰라.


보고 싶은 사람을 이제 볼 수가 없다는 거

그걸 자초한 사람이 나라는 거

그걸 안대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

내가 뭔가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이렇게 나를 무기력하게 하는 걸까?


나는 너를 만나는 내내 밀어내기만 했었지.

네 기억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밀어내기만 하던 사람으로 기억될까? 아니면 더 최악일까?


이제 와서 이렇게 널 추억하는 게 너에겐 사치처럼 느껴질 거란 생각, 내가 너에게 잘 지내란 말을 했을 때 넌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너의 말. 그게 날 더 작아지게 만들고 또 작아지게 만들고 또 작아지게 만든다.


나는 이제 네 앞에서 먼지 한 톨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게, 우리가 함께 했던 지난 몇 개월간의 추억들도 추억할 수 없게 만드네.


많이 힘들지? 분노와 배신감이 가장 크겠지? 내가 다 미워보이고 싫겠지? 지나간 시간들과 네가 들인 수고와 노력과 나에게 줬던 사랑들이 너무나 아까워 미치게 느껴지겠지? 마지막에 이렇게 끝나게 된 것이 우리의 소중한 시간들마저 오염시켜버린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겐 정말 꿈결 같은 시간들이었다는 거 말해주고 싶어. 고마웠고 정말 고마웠고 또 고마웠다는 것도.


내가 사이코패스라서, 공감능력이 없어서 너의 마음을 이해 못 할 거라고 했지? 차라리 그랬다면 좀 나았으려나. 매일 눈물이 나는데. 왜 나는 천하의 쓰레기가 되어야만 하는 거지. 매일 죄책감과 미안함과 그리움과 그리움을 느끼는 나에 대한 경멸과 그로 인한 죄책감까지 고스란히 느끼는데.


왜 나는 이제 너를 더 이상 볼 수 없어야만 하는 거지.  


알아.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그렇다는 거. 근데 그게 이제 너를 볼 수 없는 이유가 된다는 게 슬프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 관념들은 나를 욕하겠지. 그렇다면 왜 본능은, 마음은, 호르몬은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움직이도록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지금은 그것조차 점점 느껴지지가 않는데…

나에겐 최종적으로 죄책감과 수치심과 비참함만이 남겠지.


매력 있는 사람이야. 그래서 처음에 나도 모르게 끌려갔고, 정신없이 빨려 들어서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너의 옆에 누워있더라, 네 술상을 차리고 있더라.


그치만 알지? 내 상황. 내가 그 속에서 느꼈을 불안을 너는 짐작할 수 있을까? 어디에도 발 딛고 서 있지 않은 것 같은 불안감을?


아마 모르겠지. 매일 그렇게 술을 마셔도, 수중에 돈 몇천 없어도 미래가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사소한 거 하나에도 벌벌 떠는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매일이 바쁘고 전쟁 같고 정신없는데 전혀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그리고 내 옆에는 자신을 봐달라고 하는 핏덩이 하나랑 건장한 남자가 있었어. 여기서 키포인트는 뭘까? 건장한 남자일까 아니면 자신을 봐달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부담감일까?


사실, 나를 봐달라고 하는 그 존재가 나는 너무너무너무 부담스러웠어. 신경 써주지 않으면 네가 나를 칼로 찌를 것 같은 망상까지 했을 정도니까. 진짜 무서웠어, 그때. 아마 그날 밤 내가 처음으로 이별을 말했을 거야. 내 망상이 너를 살인자로 만든 그날.


지인들한테 내 욕 많이 하겠지. 그걸로 네가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실컷 해야지.

근데 그래도 나도 좋은 마음으로 만났던 남자 친구의 지인들이었데 이렇게 내가 쓰레기로, 걸레로 회자된다는 게 참 슬프다.


너와 보낸 마지막 밤, 나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고 유일한 선물이었어. 근데 그게 또 나한테 칼날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네.


네가 보낸 나에 대한 폭로 글, 나도 다 봤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내가 정말 불행해지길 바라는 걸까. 내가 매장당하길 원하는 걸까?

무섭고 슬프더라.


미안해.

그래도 나는 미안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고 해도 너의 마음이 전혀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


그래, 내가 욕심이 많았어. 인정할게.

자족할 줄 모르고 옆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만끽하지 못하고 부족한 것만 찾아 불안해했고 우울해했어. 그리고 그 빈 곳을 채우려고 요구해봤지만 잘 될 것 같지 않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거야.


이런 내 행동 패턴이 지금까지의 내 삶의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일 수도 있겠네.


내가 쓴 이 글을 너는 반의 반도 이해할 수 있을까? 너는 너만의 방식으로 이해할 거야.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고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 편지만큼은 내식대로 해석해주길. 욕심이지만 바라본다.


나, 너를 사랑했던 것 같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던 것 같아. 그리고 그걸 주지 못해서 미안해. 지나간 사랑들에 상처받고 고슴도치가 되어 방어하고 방어하고 또 방어했나 봐. 그리고 그 가시를 너 혼자 맨몸으로 받아내게 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까, 며칠? 몇 달? 몇 년?

너는 평생 그러라고 하겠지?ㅋ

네가 원한다면 그래 줘볼까.

너 혼자 아프고 힘든 거 아니라고… 그거 알려주고 싶었어.

네가 토마토와 함께 두고 간, 날 엄청 울린 편지, 그 답장이야.

보고 싶을 거야.

잘 지내.


keywor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