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인데 퇴근할 때 나 좀 데리러 와라.” 나에겐 남편과도 같은 친구가 있다. 아니, 아내와 같은 친구라고 해야 할까. 하루에 12번 바뀌는 기분을 12번 체크하는 사이다. 대학 때부터 알았으니 13년 지기다. 이 친구는 주말마다 자취방과 비슷한 내 집으로 피난 온다. 너도 이제 결혼해 나가든지 그게 아니면 월세라도 내라는 부모님 등쌀에다가 주말마다 조카 둘 앞 장세 워 쳐들어오는 오빠 내외(정확히는 3살 미만의 영유아들)를 피할 아지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응급실로 데리러 오라니, 시크함이 지나쳐서 생뚱맞은 전화였다. 갑자기 그냥 픽 쓰러졌다고 한다. 작은 기획사의 편집자인 그녀는 워낙 약골인 데다 요새 일이 몰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 급기야 구급차에 실려 왔다고 한다. 부리나케 응급실에 도착해 보니 늘어선 병상들 사이로 수액을 맞으며 하릴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친구가 보였다. 덩그러니 혼자 응급실에 누워 있는 꼴이라니. 놀란 마음이 수그러들면서 아주 그 자리에서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미웠다. “엄마한테 말하긴 부끄럽잖아. 걱정할까 부담스러워.” 아이고, 그걸 아는 애가 이게 뭔 꼴이니….
미혼 남녀 중 절반 정도만 결혼하는 시대다. 우리에겐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과 비슷한 누군가가 필요하다. 급기야는 별별 곳에 사람을 빌려주는 서비스도 나왔다. 가사 도우미는 기본, 하객을 빌려서 결혼식을 치르고, 외로울 땐 애인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책 <라이프 트렌드 2014> 를 보니 일본에선 애완견을 빌려주는 서비스가 성업 중이란다. 끝까지 책임질 필요 없이 놀다가 보내면 된다나. 시간당 1만 5000원에서 2만 5000원을 내면 남편을 빌려주는 서비스도 있다. 미혼 여성이 부부동반 저녁 모임에 가려면 10만 원을 내면 된다. 일본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라고 하던데 곧 독거노인 천국 대한민국에도 사람 대행 서비스가 붐을 이루려나. 그러나 우리에게 누군가가 정말 필요할 때는 화려한 모임보다는 궂은 자리이기가 쉽다. 독거인들에게는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말자, 어차피 혼자 사는 이 세상 아프기까지 하면 누구 손해겠니 하며 억지로라도 입에 약을 털어 넣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까부터 저쪽에서 말 못 하는 어린 아기가 우는 소리에 마음이 안 좋다. 엄마 아빠가 옆에 있다 한들 통증과 싸우는 건 아이 자신 혼자일 터, 얼마나 아프고 무서우면 저리 세상 떠나가라 울어재낄꼬. “나 왔으니까 이제 어서 여기서 나가자.” 친구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병원은 혼자 가기 싫은 곳이다. 무서워서라기보단 외로워서거나 서글퍼서가 아닐까. 병원에 혼자 누운 나 자신의 신세를 자못 한탄도 하면서 한없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 십상이다. 친구도 응급실에서 누워 있다가 혼자 저벅저벅 병원 문을 걸어 나가기는 민망하기도 울적하기도 했으리라. 내가 마침 바로 와 줄 수 있어서, 퇴원하는 친구를 고깃집으로 끌고 가 소고기 등심에 잔소리를 듬뿍 얹어 구워줄 수 있어서 뿌듯했다. 이게 바로 내가 누군가에게 가장 원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