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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겅블리 May 28. 2024

공유하기 위해서 혼자 떠나는가 :ESC

[매거진 esc] 혼자 어디까지 가봤니 : ESC :특화 섹션

직장인이 된 뒤 가장 당혹스러웠던 점은 바로 유치원 때부터 16년도 넘게 익숙해진 쉼표, 방학이 소멸됐다는 것이다. 멈추지 않고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한다는 사실은 시시포스 신화 속의 형벌만큼이나 막막했다. 때론 강제 종료 버튼을 누를 필요도 있다. 여차저차 나 홀로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동행인의 컨디션이나 약속한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나 하고 싶은 대로 나 가고 싶은 데로만 가는 여행이다.



휴가의 백미는 준비하고 가방을 챙기며 일정을 짜는 사전단계라지만 내게 가장 설레는 순간은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다. 혼자 떠나는 이들은 대부분 또 다른 ‘나 홀로 여행족’을 옆자리로 맞게 되어 있다. 일찍 도착해 자리를 찾고 떠나기 전 빈 옆자리에 누가 앉을까 기대하는 그 짧은 순간이 즐겁다. 가져온 읽을거리 말고도 좌석마다 비치된 여행 관련 잡지를 읽는 것이 내겐 정해진 의식과도 같다. 이미 여행이 시작됐는지 아닌지 애매한 시간, 비행기를 타고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터널 같은 느낌이 좋았다. 옆자리에 중년 아저씨가 앉아 코를 골기 시작하면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지만, 난 뭐 꽃처녀라고. 괜히 너그러워진 건 여행 덕분이었다.



제주도에 4번째 왔지만 혼자 온 건 처음이었다. 처음엔 혼자라고 해서 여행 일정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해안도로를 달리며 사진을 찍었다. 묵을 곳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해방감은 오래 계속됐다. 그러나 밥을 혼자 먹어야 할 땐 조금씩 심정이 변모하기 시작한다. 식도락은 다양한 메뉴를 여럿이 나누어 먹는 게 유리한데 혼자 찾은 제주에선 정말 먹고 싶은 음식 하나만 택해야 하는 고충이 컸다.


제주를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겐 바다보다 산을 권하고 싶다. 한라산은 워낙 높기도 하지만 육지의 산과는 생태계가 달라 혼자 걷는 길도 심심하지 않게 꽉 찬다. 한라산으로 오르는 길 어디선가 말들의 행렬을 만났다. 날지 않고 나란히 걸어서 찻길을 건너는 까마귀들도 보았다. 다른 나 홀로 여행객들은 이럴 때 뭘 할까? 난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열었다. 좋은 것을 봤을 때도 눈으로 마음으로 담아 가기보다는 사진기에 찍어 남기거나 에스엔에스에 기록하려는 강박이 있다. 댓글까지 확인한다. 진짜 혼자 온 것 맞아?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나 보다. 누군가와 이 순간을 공유해야 좋은가 보다. 아침 밥상으로 훌륭한 전복죽을 마주했을 때나 한라산 중턱 길에서는 혼자여서 아쉬웠다.


올레길까지 혼자 걸으리라는 계획을 서둘러 접었다. 사려니 숲을 끝으로 여행이라기보다는 가출에 가까웠던 짧은 여행을 맺었다. 제주도 나 홀로 여행은 혼잣말 같은 여행이었다. 말동무 없이 묵언수행이 길어지다 보니 실제로도 종종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래서 다음엔 뭐 하지?” 따지고 보면 에스엔에스에 남긴 것도 혼잣말이었다.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은 게 여행”이란다. 볼거리는 모자라도 좋다. 말 상대가 필요한 것만 극복한다면 다음엔 혼자서 더 멀리 가볼 수 있을 텐데.


이것도 내 혼잣말이다.



공세현 씨제이(CJ) 오쇼핑 프로듀서


2013-07-31


원문보기:

http://m.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5978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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