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넘어가면 내리막이 이어진다. 차도 쉬고 사람도 잠시 쉬어간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넘어가서인지 가는 방향으로 세상이 좀 밝아진 느낌도 난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이 한 시간 가량 따라오고 있다.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윈난을 거쳐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셋이다.
차마고도 여행은 천(川) 자 형태로 흐르는 삼강병류(三江并流)를 만나게 된다. 강을 3번이나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진사강(金沙江)은 지났다. 가운데를 흐르는 두 번째 강이 란창강(澜沧江)이다. 강은 협곡을 만들고 유유히 하산한다. 빠른 물살로 달리는 대협곡이 눈 앞에 나타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차가 멈춰 선다.
국도318번 도로에서 산사태로 길이 막혔다!
도로가 끊긴 것이다. 한여름 폭우가 산비탈을 타고 미끄럽게 쓰러지면 바로 산사태다. 며칠 전부터 비가 내렸다고 해서 염려됐는데 이제 곤란이 시작된 것이다. 심하면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도 빈번하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좁은 길에 차량이 줄을 섰다. 현지 가이드는 반 농담 삼아 '돼지라도 한 마리 잡을까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란창강 강변에서 별을 보며 ‘돼지 삼겹살?’ 좋겠다고 딱 3 초가량 기뻤다.
하늘이 내린 사고 탓에 란창강대협곡의 물살을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게 됐다. 강의 총길이는 4,909km다. 아시아에서 가장 긴 창강(长江) 6,300km, 황하(黄河) 5,464km만큼은 아니어도 길긴 긴다. 중국 대륙에서만도 2,139km라고 하는데 약 1,000km인 한반도의 두 배가 넘는 기나긴 강이다. 중국을 벗어나면 메콩강(MekongRiver)으로 이름이 바뀌어 라오스,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지나 바다로 흘러간다.
국도318번 도로에서 본 란창강대협곡 강물
세계지도를 따라, 강물의 부유물을 따라 바다까지 흘러가는 망상에 사로잡힌 시간으로 따지면 30분 정도 됐을까?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너무 싱거운 거 아닌가 싶었지만 큰 사태는 아닌가 보다. S자 도로가 이곳뿐일까마는 위험해 보이는 길이긴 하다. 불도저가 길을 뚫고 있는 모습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운전사가 버럭 화를 낸다. 사진 찍으면 안 된다는 무장경찰이 작업 중이었다. 야단맞아서 살짝 서운했지만 또렷이 무장경찰이라고 쓰여 있는 불도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란창강 강변의 작은 마을 루메이진
자그마한 강변 마을 루메이진(如美镇)에도착했다. 참 이름이 예쁘다. 마을 자체가 깨끗하거나 아름답지는 않지만 개도 사람도 한가한 동네다. 6시 반이 지났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국수와 볶음밥으로 빨리 저녁을 해결했다. 가게에서 수박도 사서 나눠먹고 다시 서둘러 길을 떠난다.
주카촌(竹卡村) 다리를 따라 란창강을 건넜다. 강을 왼쪽을 보냈는가 싶었는데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번에는 해발 3,911m의 쥐에바산(觉巴山) 고개를 넘는다. 지그재그와 꼬불꼬불, 약 8km에 이르는 고갯길이 정신 차릴 새도 없다. 길옆에는 집 몇 채만 달랑 모인 촌락이 계속 이어진다. 점점 날이 어두워지니 어둠으로 사라져 가는 집을 따라 달리고 달린다.
쥐에바산 고개 넘어 가는 길
차마고도를 새와 쥐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양의 창자로 비유한다. 고산을 넘어야 하고 안전한 발걸음을 만들다 보니 생긴 말이다. 말이 다니던 길보다 곧은길이지만 ‘창자 같은 국도’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여행객들은 산 아래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울타리를 횡단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산 아래로 내려가니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1시간이나 더 달려 오늘의 숙소 쭤궁(左贡)에 도착한다. 쭤궁은 티베트 말로 ‘밭 가는 편우(犏牛)의 등’이라는 뜻이다. 황소와 야크(牦牛)의 잡종을 편우라 하는데 아주 큰 수소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등처럼 넓다는 말인가? 힘세고 덩치도 큰 소를 상징하듯 가로 408km, 세로 220km에 이르는 면적이다.
쭤궁 현의 아침 거리
아침 햇살이 밝았다. 청아한 하늘과 산 능선에 두루 걸쳐 있는 구름이 햇살을 받아 아주 새하얗다. 밭에는 역시 초록의 칭커가 반듯하게 자라고 있다. 차마고도를 달리는 상쾌한 기분. 차창 밖 산은 하늘과 가깝고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은 친근하다. 언뜻 보면 우리나라 산세라 해도 믿겠다. 완만한 강물은 호수처럼 흐르고 푸른 초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방다대초원(邦达大草原)이다.
방다대초원의 쌀보리 칭커와 운무
란창강과 누강(怒江) 사이에 있는 고원 초원이다. 130km에 이르며 물과 풀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초원이다. 해발 4,200m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몰라도 포근한 느낌이다. 방다진(镇)으로 들어서니 시골 마을답게 단층의 가게가 다닥다닥 붙었다. 차마고도의 오랜 도시답게 말을 끄는 사람이 조각돼 있다. 처절하게 산을 넘고 협곡을 건너온 그들이 ‘일심동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쉬며 또다시 떠날 준비를 했으리라.
고요한 방다대초원의 아침 모습
고등학교 때인가 본 영화 <초원의 빛>이 생각났다. 나탈리 우드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가슴 아픈 마음을 담아 워즈워스의 시를 읊는 마지막 장면의 강렬한 인상. 그러나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를떠올리기에는 티베트 초원, 참으로 복잡하다. 화물차가 빠르게 지나가는 길을 뒤따라 오체투지로 걷는 사람이 나타났다.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일어나는 무한한 반복 동작으로 몇 천 km를 여행하는 사람들.
방다 진 광장의 차마고도 상징 조형물
오토바이로도, 자전거로도, 자동차로도 질주하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그들의 영혼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초원의 빛이여! 그 빛이 빛날 때, 그때 그 찬란한 빛을 얻으소서!”라고 새겨봐도 ‘찬란한’ 영혼의 빛은 아침 햇살이 아무리 환상적이라 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명’을 이으려고 횡단과 종단을 반복한 ‘노동’을 통해 ‘하나’가 된 그들의 고운 영혼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됐다는 감사한 마음만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