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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비니 Jan 24. 2020

[프롤로그] 아빠를 기다린 아기

아기 콩이와 만난 날

아기 콩이의 발도장

'웅..우웅..우우웅..'


2019년 12월 14일 아침 8시 20분이 조금 못 미친 시간. 난 강남차병원 본관 2층의 남자 화장실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잠시 놀랐다. 혹시 전화가 올지 몰라 이미 오른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는데, 예상 밖 다른 진동이 울린 탓이었다. 내가 입고 있던 콜롬비아 플리스 왼쪽 주머니에서 또 다른 스마트폰이 '우웅웅' 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


30분 전부터 아내의 전화를 대신 맡고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 나는 이내 깨닫고 서둘러 전화기를 꺼내 받았다. 화장실에서 듣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기다렸던 소식을 전해줄 전화인 것 같아 내 목소리는 떨렸다. 발신인은 강남차병원의 간호사 선생님이었다.


나 : (떨리는 목소리로) "네, 여보세요."


간호사 : (다급한 목소리로) "여보세요? 오○○님 남편분 맞으시죠?"


나 : (민망한 목소리로) "네, 맞습니다. 혹시 아기 나왔나요?"


간호사 : (의아한 목소리로) "네, 나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버님 어디 계세요? 얼른 오셔야 하는데요…"


나 : (강조하는 목소리로) "제가 정말 잠시 화장실에 왔는데요. 1분이면 갑니다. 아니 1분 내로 갈게요! 잠시만요!"


내가 하필 배탈 때문에 아침 일찍 화장실에 머물렀던 이날은 우리 가족 구성원이 한 명 늘어난 날, 바로 아기 콩이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었다. 오랜 시간 콩이를 만나기를 그렇게 고대했건만 나는 정작 만남이 임박한 시간에 화장실에 가 있었다. 난 전화를 끊자마자 병원 계단과 복도를 헐레벌떡 뛰었다. '아기가 아빠를 거꾸로 기다리게 하다니'라며 속으로 자책하면서.


41+1일 만의 만남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 사연은 이렇다. 41주 더하기 1일. 우리 부부가 콩이를 만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아기는 엄마 뱃속이 좋은지 출산 예정일인 임신 40주를 넘어서도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배 가장 윗부분에서 발을 차는 게 계속 느껴질 정도였으니 아기는 산도로 내려올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셈이었다.


자연분만을 원했던 우리 부부는 아기가 스스로 나올 준비를 마치길 바랐지만 40주가 지난 상황에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아기가 커질수록 자연분만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고, 40주를 넘기면 아기에게 좋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 유도분만을 시도하기로 했다. 41주가 되는 날 아침 일찍 유도분만을 시도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전날 늦은 밤 가족 분만실로 입원해야 했다.


유도분만은 자궁 수축을 촉진하는 촉진제를 투여해 인위적으로 진통을 일으켜 분만을 유도는 방식이다. 아내는 이를 위해 41주 당일 아침 일찍 잠에서 깨자마자 수액과 촉진제를 투여받기 시작했다. 밥도 먹지 못한 채 여러 개의 주삿바늘을 팔에 꽂고 있는 아내를 보니 난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통은 늦은 오후까지도 아내를 찾아오지 않았다. 진통이 커질수록 출산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할 텐데 아내는 촉진제 투여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진통 밖에는 느끼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단순히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결국 의료진은 유도분만을 내일 다시 이어가겠다며 휴식을 권했다. 저녁은 외부 음식을 포장해 와 먹으라고 했다.


난 영양 보충을 종일 수액에 의존해야 했던 아내를 위해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고 싶었지만, 시간의 제약 등으로 병원 옆 분식집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사 온 음식은 라볶이, 쫄면, 김밥, 고구마 치즈크로켓 등 아내가 주문한 소소한 것들이었다. 우리 부부는 "내일은 콩이를 만날 수 있겠지?"라고 기대하며, 아기에게는 "내일은 만나자"라고 당부하며 최후의 만찬을 즐겼다. 이후 우린 만족감과 설렌 마음을 가지고 잠들었다.


새 아침이 밝았다. 잠들기 전 나는 새날에 다시 촉진제를 맞고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새날 아침은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 아내가 촉진제를 다시 투여하기 위해 준비하던 때 아기의 심박 수가 잠시 크게 떨어졌다가 회복되는 일이 있었다. 당직 근무를 서던 당직의 선생님은 아기가 유도분만을 힘들어하는 것이라고 급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어서 빨리 제왕절개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아내는 여전히 제왕절개보다는 자연분만을 하기를 원했지만, 아기가 힘들어한다는 말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기에게 미안해서였다. 난 제왕절개를 한 번 더 권유하는 당직의 선생님에게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 준비는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난 보호자로서 수술 중 있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설명을 들었고, 몇 가지 관련 서류에 사인해야 했다. 당직의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은 내게 담당 교수님이 아침 회진을 도는 대신 수술실에서 아내를 맞이할 것이라고 말해줬다. 수술은 응급 제왕절개로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일반적인 제왕절개와 달리 위급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서 산모의 하반신만이 아닌 전신을 마취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남편인 나는 수술실에 들어갈 수도, 아기 탯줄을 자를 수도 없다고 했다.


살짝 아쉬웠지만 난 "아기 건강하게 태어날 테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안심시키며 아내를 아침 7시 50분쯤 수술실로 들여보냈다. 난 하루를 꼬박 보낸 가족 분만실에서 짐을 정리해 수술실 앞으로 나왔다. 아침 8시부터 수술이 시작되고 아기는 15분 정도 후면 세상에 나온다고 했으니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싶었다. 엄마인 아내보다 아빠인 내가 아기를 더 빨리 만나는 장면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마음이 왜인지 들뜨기 시작했다.


마음이 들뜨고 폭풍 같았던 바쁜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전날 먹은 라볶이와 쫄면이 살짝 매웠던 것이 복통의 원인으로 유력해 보였다. 난 아기가 나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버틸 수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고 난 어서 빨리 배탈을 해결하고 돌아와 아기를 맞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짐을 모두 놓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어 난 병원 이쪽저쪽을 잠시 더 돌아다녀야 했다. 그렇게 시간을 소요한 탓에 난 결국 아기가 아빠를 기다리는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더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만남

작은 움직임에 아빠는 그렁그렁


난 오전 8시 20분쯤 수술실 앞에서 신생아 보호 카트에 누워있는 아기 콩이를 처음 만났다.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를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은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간호사는 늦게 온 내게 먼저 확인해줄 게 있다며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싸개를 벗겼다. 오른손 왼손 오른발 왼발의 개수를 일일이 세는 등 아기의 몸과 건강 상태를 확인해주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갑작스러워 당황스러웠다. 아기는 머리가 양수에 젖어 꼬불거렸고 몸은 작고 조그마했다. 아기는 싸개를 벗기자 한기를 느꼈는지 몸을 벌벌 떨었다. 연약해 보였다. 칭얼대던 아기는 손가락 발가락을 모두 세었을 때쯤 온 힘을 다해 울기 시작했다. 울음 때문에 떨리는 몸, 힘겹게 숨 쉬는 모습을 보니 내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모든 기다림의 시간이 이 만남을 위한 것이었구나.' 눈물이 핑 돌면서 나는 우리 부부가 아기를 기다려 온 시간이 사실 41주 더하기 1일 만이 아님을 떠올렸다. 3번의 시험관 아기 시술과 41주간의 임신 기간, 그리고 마지막 아기가 아빠를 기다린 시간까지 모두. 모든 시간이 이 축복 같은 만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난 생각할 수 있었다.  


난 그 순간 긴 기다림의 시간, 만남의 순간, 그리고 앞으로 아기와 보낼 시간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아기를 기다리게 한 아빠이지만 아기를 기다렸던 그 시간을 진한 농도로 살아왔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졌고, 앞으로 아기와 긴 시간을 농도 짙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싶어져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먼 훗날 아기가 자라 이 글을 읽게 되기를 바라면서 첫 글을 완성한다.

다음 편 - "자신하지 마, 임신은 쉬운 일이 아니야"
https://brunch.co.kr/@sangbin7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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