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지옥 사이에서 찾는 향수
노량진 지하철역에서 3분도 되지 않는 거리. 학원가가 즐비하고 식당, 술집이 사방에 있지만 책방진호는 뜬금없이, 그러나 위화감 없이 그 자리에서 수년간 서있다. 노량진이라는 지리적 이유 때문인지 취급하는 책들이 대부분 고시 서적일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들어가고 싶지 않을수도 있다. 하지만 들어가는 순간 그 편견은 깨진다. 오래된 서적, 각종 소설, 읽었던 책들의 예전 판본들이 나를 반겨주더라. 책방은 그렇게 크지 않다. 방 하나정도의 크기에 책장이 3면을 차지하고 많은 책들이 땅바닥에 쌓여있다. 그 사이에서 주인 할아버지는 작은 책상 뒤에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다. 할아버지 뒤에는 작은 통로가 있는데 그 뒤 작은 방에는 외국 서적들이 자리잡고 있다. 할아버지는 내가 사진을 찍고 책을 구경하는 동안 책 몇 권을 쌓아 두고 찬찬히 읽고 계셨다.
책방 진호에는 특이한 점이 또 있다. 할아버지의 취향 때문일까 마음에 드는 미술과 미학 관련 책들이 꽤 있었다. . 나 또한 서점을 들어가자마자 램브란트의 작품집을 발견했다. (물론 책방을 나올때 결제 하고있는 나자신을 발견했지만.) 책방 한쪽 구석에 꽂혀있는 미술서적을 구경하는거도 이 책방 나름의 재미일 것이다.
사실 요즘 어딘가에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을 신기하게 처다보고 대단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책방진호의 주인 할아버지가 찬찬히 책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여느 일상과 다름없다. 이런 모습으로 손님이 한명도 없는 날에도 어감없이 앉아있을 것만 같다. 대단하다는 생각보다 ‘아 저 모습이 저사람의 일상이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생각해보면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여가시간에 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을 자주 접하기 쉽지 않았을 터. 그시절에는 책보고 얘기하는게 일상이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몇십년이 지난 시대에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대단하다는 시선을 줄까. 궁금하다.
이 책방에서 내가 산 책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램브란트의 작품집이다. 언제 출간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낡은 하드커버 양장본이다. 제목도 Rambrant. 간결하다. 램브란트는 올해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기억이 난다. 루브르에 오랜 시간 있을 여유가 없어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북유럽 미술만 보고 나오기로 했다. 이날 램브란트의 작품을 보고 온 것을 유럽여행 중에서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램브란트는 보는 이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화가다. 카메라가 찍는 고화소의 그림도 아니고 엄청나게 사실적인 묘사를 하는 극사실주의 그림도 아니지만 피사체를 실제로 보고 만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 중에 도축된 소의 그림이 있다. 루브르에서 이 사진을 보았을때 이 도축된 살코기의 질감을 눈으로 만지는 듯했다.
지금처럼 컬러 프린팅이 보급 안 된 시절 나온 책이라서 이 책은 램브란트의 그림을 인화한 다음에 그것을 책에 붙이는 형식의 책이다. 종이 위에 덩그러니 붙어있는 인화지 때문인지 갤러리에 와서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보는 것이 훨신 더 나은 미술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간접경험을 하자면 이 책도 나쁘지 않다. 자주 펴 보진 않겠지만 갑자기 생각날때 펴 보기에는 더할나위 없다.
책방진호,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입시지옥, 공시지옥 사이 이 공간만은 시간이 멈춘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