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가와 골목길, 그 공간의 공존
복잡한 1호선을 타고 용산역에 내리면 높은 고층빌딩들이 듬성듬성 서있다. 복귀하는 군인들, 중국인 여행객들, 서로를 찾으려고 전화하는 연인들이 정신없이 움직인다. 역 한켠에는 수능이 끝나고 더 추워지기 전에 바다라도 보고 오려는 고등학생들이 끼리끼리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헌책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서점, 뿌리서점으로 여행을 가보려고 한다. 뿌리서점은 40년 동안, 용산에서만 16년 한 자리를 지켜온 서점이다. 번화가에서 뻗어 나온 한 골목에서 늙은 책들이 새로운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뿌리서점에 들어갔을 때 처음 드는 생각은 ‘음? 생각보다 크네?’였다. 조그마한 간판 아래, 분류가 덜 되어 쌓여있는 책들을 지나고 나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 옆에는 오래된 CD들이 진열되어 있다. CD들을 구경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미 지하 서점이 나온다. 서점에 들어갔을 때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물론 헌책방에서 많아도 4~5명이지만 나름 기분 좋은 당황스러움이다.
주인아저씨는 할아버지 한 분과 얘기를 나누시다가 내가 들어오자 반갑게 인사를 걷내신다. 서점 안 사람들은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한잔씩 들고 돌아다니고 있다. 나 또한 커피 한 잔 얻어먹었다. 헌책방만의 매력 아닐까.
처음으로 내 이목을 끈 책들은 한쪽에 쌓여있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였다.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1995년 5월호를 발견했다. 내가 태어난 달에는 무슨 사진들이 찍혔을까. 넘겨보니 딱히 별 일도 없었다. 무미건조한 달에 태어난 듯하다.
이 헌책방의 장점은 상대적으로 넓은 구조에 있다. 책장 사이 공간도 넓고 간이 의자들이 많아 앉아서 찬찬히 읽기 좋다. 건축 사진전, 커피 매거진, 이상문학상 전집 등등 이리저리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시집들을 모아 놓은 곳에서 오늘 살 책을 발견했다. 바로 이해인 수녀의 ‘두레박’이다. 이해인 수녀의 수필과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나에게 이해인 수녀님은 수녀이기 이전에 시인이시다. 수녀님의 시는 따뜻한 아름다움이 있다. 시인의 시 중에서도 ‘황홀한 고백’을 가장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이해인 - 황홀한 고백
이만큼 사랑을 아름답고 설레게 표현한 시가 또 있을까. 한 시간 넘게 지하에서 입고 있던 코트 때문일까, 따뜻하다.
서점을 다시 나오면 햇빛이 얼굴을 두들긴다. 잠시 잊고 있었던 초시계가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다. 몇 발자국 걸으면 용산의 번화가가 나온다. 서점과 번화가. 두 공간이 이렇게 공존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 여유와 바쁨, 추억과 현실, 이 골목길에서는 둘 다 느낄 수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 미드나잇 인 서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