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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줌 May 09. 2022

삐뚤어진 기버(giver)


나는 기버다.

언제부터였을까? 주는 게 좋은 삶을 살게 된 건.

대학 다닐 때 등록금을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수시로 알바를 했다. 용돈벌이로 알바를 하다가 일을 하기 싫으면 안 쓰는 것으로 그렇게 학업 중에 알바 생활을 병행했다.

어떤 이는 명품 옷을 사겠다고 알바를 하거나 등록금에 보탬이 되고자 일을 했지만 내 아르바이트비는 오로지 내 생활비로 이용됐다. 그런 의미에도 거하게 무엇을 먹거나 빛나는 아이템을 사본일이 없다.


항상 흐지부지. 의미 없이 잔잔히 소비되고 있었다.

그렇게 취업해서 월급을 받을 때도 명품을 사본일이 없다. 매일같이 술 먹고 놀기 바빴다. 여러 가지 패션을 다양하게 고집하던 나는 많은 옷을 가졌지만 딱히 비싸다 할 옷마저, 신발도 없었다. 그것이 평생 지지부진하게 잔돈으로 소비하는 소비 쟁이의 끝인 듯하다.


비싼 거 하나 할래. 싼 거 잔뜩 할래?

누가 묻지도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싼 것들로 내 삶을 휘어 감았다.

나의 소비는 내 마음의 빈 여백이 없게끔 끊임없이 물건으로 채웠다. 왜냐면 처음부터 엄청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그 범위의 비싼 것 싼 것을 고를 여지가 있지만. 난 단지 싼 것만을 고를 돈밖에 없었고 큰돈을 모을 준비가 없었다. 당장의 즐거움만을 만끽하는 것이다.

하지만 돈을 모으지 않으려고 한건 아니다. 아등바등 모으려고 노력해봤지만 자취생에 월세, 세금, 기본적인 고정지출은 언제나 크게만 느껴졌다. 적어도 내 월급의 절반을 주거비가 삼켜먹는 듯했다고 그때를 회상해본다.



그렇게 결혼을 했다.

모든 싼 것들은 모두 버리고 몸뚱이 하나만 들어갔다. 싼 것들이라 버릴 때도 아깝지 않았지만 더 이상 싼 것들은 사지 않기로 했다. 소중하지 않으니 또 버려질 뿐이리라. 그렇게 내 잔잔바리 소비는 문을 닫았다.


24평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시댁에서 1억을 보태주셨고 나머지는 모두 대출이었다. 우리 부부의 모아둔 돈은 20년 된 아파트 리모델링과 살림살이하는 것에 쓰였으니 부동산을 봤을 땐 그냥 아버님 지분 100프로였다.

그런 아파트가 2배로 올랐다.

그 집에 사는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지만 그렇게 이사를 고민할 때가 '양도세가 오른다 '  할 쯤이다.


집값이 2배로 오르니 이사 갈 집의 선택은 오직 하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가격으로 최상의 집을 사는 것. 그 후 그 집 가격도 두배로 올랐다. 최고가 8억을 터치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일해도, 월급쟁이 남편 월급을 하나도 안 쓰더라도 그렇게 모을 수 없는 것을 그렇게 달성했다.


내가 한건 뭐냐고?

은행 대출을 다달이 갚아나가는 것. 그것만으로 재산을 올렸다. (현재는 부동산 대출 없음/  또 생길 수는 있음)


그 과정 속에 주변에 부동산 가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울 집값이 8억이 15억이 되고 연예인이 산 45억 빌라가 105억이 되었대. 금리가 3프로대로 저렴하니 내 집 마련이 중요하다고. 돈이 돈을 버는거라고. 하나 무리해서 가고 싶지 않다는 내 주변의 사람들과 그 타이밍은 비껴갔다.


내 삶의 목적은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살 자였는데 주변은 좀처럼 즐길 여유가 되지 않았다.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선뜻 밥을 샀다. '계속해서 무얼 먹자. 무얼 하자. 공평하게 돈 내자' 고 하는 것이 남편월급으로 살림하는 가정주부에게 펑펑 쓰는 것이 부담이 될까봐서다. (남의 가계 걱정까지 해주니 참으로 별 걱정도 많은 타입이다. 자주 봐야 하니 더 부담 가지지 않고 놀고 싶었다.)  한 번을 먹더라도 맛있는 거 먹자. 풍성하게 비싸게.

내가 돈을 벌고 그것으로 사람들과 즐기는 것이 행복했다.



애들 옷에 관심 있는 언니는 예쁜 아이 옷을 사서 몇 번 주었는데 직구라서  아주 싸다고 했고 어떤 언니는 내가 애기 본다고 끼니를 못 챙겼다고 하자 날 위해 요리를 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어떤 이는 한번 사면 본인도 한번 사는 식으로 본인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의 만남은 이어나갔다.

분명 대가를 원하고 밥을 산 것이 아님에도 정으로 돌아왔다. 그때를 기억하면 항상 따뜻하다.



하지만 좋았던 이웃과 오래 할 수 없었다. 4~5년 정도 이어오던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이사를 갔다. 내가 새로운 터에 이사 후에도 나의 giver는 계속됐다.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밥을 샀더니 어떤 이는 얻어먹기만 했다. 어떤 이는 부담스러운지 만남을 피했다.(좋은 사람도 많지만..) 내가 주는 이유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 이상한 사람이라 비칠 만도 했다. 선한 척 다가가서 해코지를 한다는 건 많은 사례들이 있으니.

(그래서 친한 척 다가와 물건 사라고 하는 잡상인이 될까 봐 아는 사람에게 내상품을 홍보하지 않고 뭐하는지도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친한 척 다가가는 잡상인이라는 닉네임을 달기 싫다.




끈끈한 인연이  아님에.

본인만의 방법으로 서로서로 정답던 그때는 없었다.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나도 점점 주는 것이 아까워졌다. 그 사람이 달라고 하지 않았으니 괜히 주고서는 서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든 서민들의 생활은 그러하다.

나 역시도 그렇다. 다만 좋은 타이밍과 기회로 잡은 부동산 한 채에 왜 든든함을 느끼며 기버(giver)가 되었을까.

'조금이나마 내가 그 독을 막아줄게. 더깨 지지 않게 부여잡고 있을게. 얼른 채워. 같이 든든한 독이 되자.' 말하고 싶었지만 한낮 아무것도 없는 서민일 뿐이고 또 누군가에겐 그렇게 다  부동산 올라탔다. 너만 있냐?

별로 커 보이지도 좋아 보이지도 대단하지도 않으면서 내 행동에 비웃고 있는 듯했다. 난 언제쯤 내 주위의 사람들과 즐겁게 놀고먹을 수 있을까? 다 같이 잘살자고 말해보지만 여유가 없다. 내 주변을 다들 밝게 채우려면 나 자신은 얼마나 채워야 할까?얼마나 벌어야 할까?



그렇게 잔잔했던 기버(giver)는 더 이상 기버(giver)의 삶을 포기한다. 벼락부자도 아니면서 오만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 코가 석자임이 밝혀진 거지.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글의 기버(giver)의 의미는 주는 자입니다.

기부의 의미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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