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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니 Nov 20. 2023

여의도에서 50년 된 아파트에 입주하다

근현대의 역사를 곳곳에서 만나며 사는 기분 

 23년 6월, 5년간 거주했던 신혼집을 떠나 여의도로 이사 왔다. 여의도라는 동네 이름만 들으면 설레는 일이었지만, 이사 들어가는 아파트가 무려 50년 역사의 '시범아파트'(1971년 건축)였다. 우리는 2025년 여름쯤 이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딱 2년 살 곳을 찾던 중에 시범아파트를 만나게 되었다. 아파트 연식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집주인과 서로 간의 조건이 잘 맞았고, 50년이라는 연식에 비해서는 관리도 잘 된 편이었다. 


 시범아파트는 24개 동 어디에서나 울창한 나무와 얼룩덜룩한 외벽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 동만의 특별한 점이 있다면 바로 63 빌딩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맑은 날이면 63 빌딩 전면에 구름이 비쳐 보이는데, 마치 매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미디어 아트를 보는 기분이라 개인적으로 참 좋아한다. 

구름이 비쳐 보이는 63 빌딩의 모습


 다시 얼룩덜룩한 외벽 이야기로 돌아가서, 외벽은 언제부터 현재의 상태로 멈췄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건드리지 않은 것 같다. 이삿날, 부모님이 오셔서는 집과 동네를 둘러보시면서 가장 신경 쓰여하셨던 부분도 바로 이 '외벽'이었다. 재건축 논의가 나온 이후로는 더더욱 도색 가능성이 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최근 도색 작업을 진행한다는 공지가 발표되었다. 오래 보면 마치 테라조 무늬 같이 느껴지는 이 외벽도 올해 안에는 자취를 감출 예정이다.   

얼룩덜룩 외벽


 집 내부는 최근 리모델링을 마쳐 깔끔했지만, 남들에게 보이는 아파트 외벽이 얼룩덜룩하다 보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드시는 듯했다. 마치 허옇게 각질 일어난 다리로 바디로션도 안 바른 채 동네를 활보하는 자녀를 우연히 발견한 기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나와 남편도 처음 이 집을 보러 오던 길에는 외벽을 보고 연식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고, 조금 놀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들어와 살기 시작한 뒤로는 집순이 집돌이였던 우리 부부에게 외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밖에 나가는 일이 적으니 외벽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보낸 날이 많았다. 


 오히려 외벽보다 우리가 연식을 느낄 수 있었던 포인트는 우리 집 출입구에 위치한 '장독대'였다. 복도형 아파트에 '장독대'가 있다는 사실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집집마다 장독대가 있던 시절에 시범적으로 만들어진 아파트이기 때문에 그 시절의 고객 니즈를 반영했던 것 같다. 


집 현관과 복도 사이에 위치한 장독대


 장독대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집 문 앞에는 2단짜리 계단이 있다. 우리야 계단이 귀엽다 느꼈지만, 이삿짐센터분들은 집으로 물건을 들이는 과정에서 계단을 거쳐야 해 평소보다 조금 더 고생하셔야 했다. 이제 장독대를 정말 장독대로 쓰는 집은 없고, 다들 개인 창고로 개조해 쓰고 있었다. 우리 집의 경우 한쪽은 창고로, 한쪽은 장독대로 남아있어서 이 귀중한 사료(?)를 눈으로 담을 수 있었다. 


 우리 집 장독대는 이제 택배를 받아두거나 컬리 퍼플 박스를 내어 놓는 용도로 잘 쓰이고 있다. 사실 화분을 내어 놓고 키우고 싶기도 했는데, 우리 층 복도까지 까치가 날아와 수다 떠는 걸 본 뒤로는 화분을 내놓았다가는 까치에게 다 뜯어 먹힐까 봐 포기했다. 

 

우리 집 앞 복도에서 까치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던 날


 아, 딱 1번 장독대에서 불꽃놀이를 보기도 했다. 마침 위치가 잘 맞아떨어져 장독대에 서서 불꽃놀이를 한참 즐길 수 있었다. 


 여의도의 오래된 모습은 우리 아파트만이 아니다.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와 매력이 또 무궁무진하다는 걸 살면서 느끼고 있다. 하지만 재개발이 논의되는 아파트가 많은 만큼 곧 지금의 매력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 어쩌면 다신 볼 수 없을 여의도의 모습을 기록해나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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