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우울증 극복기
우울증 치료를 받다 보면 진료 시간 전날부터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면 요즘의 나는 어떤 기분이고, 어떻게 생활하는 지를 물어보시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평범한 하루의 행동들도 선생님의 분석 후에는 내 기분과 변화를 설명해 주는 증거들이 된다.
몇 번의 진료를 거듭하면서 스스로 나의 변화, 나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나를 위해 선택하고 행동하는 시간이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취향, 나의 선호보다는 당장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선택, 결정하다 보니 '나다움'을 점점 잃어가는 듯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에 대한 덕질을 시작했다. 나의 활동명 (현 회사에서는 모두가 영어 닉네임으로 부르고 있다)을 새겨 넣은 맞춤 폰 케이스를 주문하고, 업무용 노트북 또한 내가 좋아하는 그림과 문구들로 채웠다. 나의 취향을 모아담을 '취향 노트'도 하나 만들었다. 전시를 다니고 각종 페어를 다니며 발견한 나의 취향들 (예를 들면, 누군가의 전시회 리플릿에서 발견한 좋은 그림이나 오며 가며 받은 작은 엽서들에서 발견한 아름다움들 같은 것이다)을 모아나가기 위함이었다. 옷과 신발도 유행하는 스타일, 혹은 가장 유행을 타지 않는 평범한 스타일이 아닌 내 눈에 예뻐 보이는 스타일로 주문해 옷장을 채워나갔다.
이것저것 나의 취향으로 고르고 담다 보니 정말 '나다운' 컬러와 디자인들이 모였고, 그 안에서 자연스레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약간은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한 소비들도 있었는데, 주치의 선생님은 나를 위한 소비를 통해 자존감이 높아질 수도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이 과정이 마치 나를 '덕질'하듯 느껴졌다.
내가 무엇을 가장 좋아하고 어울릴지를 생각해 그에 꼭 맞는 아이템들을 찾고 선물하는 것. 아이돌 팬들이 스타의 취향을 고려해 고심 끝에 준비하는 선물처럼 나도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릴 만한 것, 내가 제일 좋다고 느끼는 것들을 찾기 위해 더욱 고민하고 그 결정 끝에는 고민 없이 결제했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그저 '택배가 쌓이는 소비'처럼 보일 수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배터리가 방전되려고 하는 '나'라는 사람을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가는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행, 혹은 가성비가 뛰어난 물건들도 의미가 있고 좋지만 그것들보다 '나다운 것'이 나를 가장 많이 채우고 있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일에 치이고, 가족 혹은 주변의 일에 치이다 보니 늘 '일'을 1순위로 두었던 것이 나의 취향과 선호를 후순위로 자꾸 밀어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이 드는 때가 있다면 당신도 꼭 스스로를 덕질해 보시기 바란다. 별 거 아닌 소비라도, 별 거 아닌 행동이라도 나에게 자존감을 쌓아주는 행동이 있고 나를 잊어버리는 행동이 있기 마련이다. 나야말로 나다움을 가장 잘 채울 수 있는 사람일 테니, 스스로를 덕질하면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