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드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생활 리듬이 좋아졌다는 주치의 의견으로 진료 텀이 1주에서 2주로 길어졌다. 주치의 선생님이 느낀 것처럼 나 또한 훨씬 안정되고 있음을 느끼던 차였다. 전에는 누군가와 통화만 해도 눈물이 울컥 올라오곤 했는데, 이제 통화 정도는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대면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특히 누군가를 앞에 두고 내 속 이야기를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덜컥 울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최근 만났던 친구에게도 결국 깊은 이야기는 꺼내지 못한 채, 가벼운 일상 대화만 한참을 나누다 헤어졌다.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3주가 다 되어갈 때쯤 오랜만에 가까운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첫 직장에서 만나 같은 동네에 살며 가까워졌는데 워낙 단단한 친구라 나의 이야기도 덤덤하게 들어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내 이야기를 정말로 나눠야겠다 결심했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만남은 금요일 밤, 회식으로 모여든 단체 손님들 사이에 끼여 대화가 쉽지 않은 삼겹살 집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서로 안부를 묻던 질문에 조금 용기를 내어 내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의 큰 목소리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우리의 이야기는 묻히는 듯도 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테이블이 우리 이야기를 들을까 걱정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친구는 '많이 힘들었구나' 한 마디와 함께 나의 우울함을 하나의 대화 주제처럼 다루어 주었다. 우리는 우울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멈추지 않고 회사 일, 친구네 본가에서 키우는 강아지, 각자 시댁 이야기, 필라테스 이야기까지 온갖 시시콜콜한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어쩌면 심각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 대화 주제를 그저 수많은 주제 중 하나로 여겨주니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우울증에 걸렸고 치료 중이라고 해서 주변 친구들에게 꼭 나의 상황을 알려야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우울증 증세가 튀어나왔을 때 나를 대신해 주변을 정리해 주거나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둘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몇 명의 직장 동료였고, 몇 명의 가까운 친구들이었고, 남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이라 하면 상호 간의 대화에서 '내 마음에 파동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다양하다. 어떤 사람과의 대화는 늘 다이내믹하고 새롭지만 동시에 나에게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내가 뒤쳐지지는 않았는지, 혹은 너무 안일하게 살고 있지는 않았는지, 더 많은 돈을 모아야 하는 건 아닌지 등등. 내가 이야기하는 '내 마음에 파동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와 대화해 주는 사람들이다. 나를 평가하지도, 조언하지도, 혹은 비교하지도 않는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말은 나를 낮추는 말도, 나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없이 말해왔고 들어왔듯이 그저 '마음의 감기'에 걸릴 것뿐. 그리고 누군가에게 마음의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고 싶다면 꼭 '내 마음에 파동을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전하기를 추천한다. 지금은 내 마음을 온전히 지켜나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