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진료 후 약을 받아와 먹기 시작했다. 약효가 올라오기까지 2주는 걸린다던 선생님의 말씀과 달리, 다행히 나의 경우에는 약을 먹기 시작한 초반부터 걱정하는 시간과 횟수가 많이 줄었다.
덕분에 불안은 줄었지만, 오히려 무기력해진 나를 발견했다. 누구보다 잘 먹던 내가 식욕이 떨어져 한 공기는 거뜬히 비우던 밥을 반공기 겨우 비우고, 집에서 가만히 재택근무만 했을 뿐인데도 피곤함에 지쳐 저녁 7시부터 침대에 누워있곤 했다.
불안한 생각이 줄자 눈물을 흘리는 횟수는 함께 줄었는데, 신체는 오히려 무기력해지니 '이게 맞나?'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약을 먹은 지 일주일 후 두 번째 진료날, 지난 일주일의 경과를 물어보시는 선생님께 유독 무기력했던 최근 일들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평소 너무 높은 긴장도에서 생활하던 사람에게 불안과 함께 긴장도가 사라지면서 긴장도가 낮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과도기 같은 시간일 수 있다고 얘기해 주셨다.
그러고 보니 최근 3년간의 내 생활이 얼마나 긴장도가 높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후 밤낮없이 일하기를 반복했고, 최근에는 한 브랜드의 마케팅을 총괄하기 시작하면서 실무는 줄었지만 오히려 긴장감으로 인한 불안함의 매일을 겪고 있었다. 업무의 양도 적지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숫자(매출)로 내 성과를 보여줘야 했고, 예상보다 매출이 안 나오는 날이면 지금 무엇이 잘 못 되었고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지 생각하고 다음 마케팅 액션을 고민하기 바빴다. 혹시라도 이슈가 터지면 그게 몇 시건 수습하기에 바빴다.
일로 인한 긴장이 가득했던 하루는 곧 불안으로 가득 찬 하루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약으로 인해 불안을 줄여드니 내 하루에 큰 빈틈이 생긴 듯했다. 갑자기 사라진 긴장을 채울 줄 모르니 무기력함에 빠지게 되었던 게 아닐까. 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정작 나를 채우고 나의 취미 같은 것은 만들 새 없이 나의 하루를 일로만 채워왔던 걸까. 스스로가 한심하고 안타깝게도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내 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건은 정기적으로 시간을 낼 필요 없이 나에게 갑자기 생긴 여유 시간에 할 수 있는 가벼운 일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방법으로 나는 내가 평소 소비하던 콘텐츠를 내가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늘 보기만 하던 릴스도 스스로 만들어보고, 다꾸 겸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언젠가 사두었던 책들에도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회사 일로만 가득 차있던 내 하루와 머릿속을 내 일로 조금씩 채워나가자 무기력함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나가는 듯했다. 가볍게 한 두 개 올려보았던 릴스 중 한 콘텐츠는 조회수가 1900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다꾸 겸 일기만으로 아쉬워했던 글쓰기는 나를 브런치 작가가 되게 만들기도 했다. 작은 '내 일'들에서 만들어지는 성취감에 무기력함은 줄어들고 작은 에너지들이 샘솟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무기력함이 종종 나를 찾아오고, 8시가 되면 침대에 눕기도 한다. 하지만 매일이 무기력하지는 않다. 예전에는 회사 일에 온 체력과 생각을 쏟고 지쳐 잠들었다면, 이제는 내 일에도 시간을 투자할 수 있도록 스스로 체력도 생각도 조절해 나가는 중이다. 회사 일이 내가 에너지를 쓰는 일이라면, 내 일을 통해서는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게임 캐릭터로 치면 다시금 HP를 채우기 위한 행동이랄까?
HP를 채우는 일은 나에게 늘 먹거나 자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도 HP가 다시금 차오를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요즘 들어 더욱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