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던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찾았다. 집안 정리는 그래서 중요하다. 내가 '사고', 아내가 '읽고', 딸아이가 '챙겨 놓은' 책이어서, 나보다는 정리를 잘하지 않는 딸아이 방 안에서 발견되었다.
잔소리를 그렇게 늘어놓아, '책을 보관하고 싶으면, 책을 정렬해야 돼'라는 말을 설득시키는 데도 한참 걸리고, 결국 오빠와 함께 이케아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장을 사서 조립하여 정리하라고 하니, 밤새 한 것 같다. 그 책장에 꽂혀 있는 그 책을 뽑아서 내 책장에 꽂아 놓았다.
'수집가의 철학'이라는 책이 있다. 그 제목이 말해 주듯, 책을 사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몇 안 되는 발현 중의 하나다. 내 인생은 온통 수집 일색이다. 음반과 책을 사서 모은다. 한때는 보드게임을 엄청 좋아해서 그것도 꽤 사 모았다. 모을 때 무슨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오히려 감각이다. 그것을 모아놓고 돌아볼 때,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한다.
나는 노트를 잘 쓰지 못한다. 그러나, 캘린더 관리는 곧잘 한다. 내가 한 일을 간단히 메모하고 기록하는 것을 구글캘린더에 써 놓는다. 이 또한 '나의 행동을 수집'하는 것이다. 내 전공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유전자원을 수집하고 그것에서 교배를 하고 변이를 창생 한 후, 다양한 방법으로 수집(또는 '선발')하고 정리(또는 '육종')한다. 이 중에서 그래도 철학이라는 단어가 적용될 만한 묵직한 것은 식물을 개량하는 내 본업일 테다.
그런데 모으는 것의 진정한 미학은 '버리는 것'이다. 수집된 하나하나가 설명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 자리에 왜 다른 것이 오지 못했냐는 질문이다. 음악사의 그 수많은 음반들을 보면서, 인터넷몰의 그 수많은 책들을 보면서, 왜 다른 것들은 버려졌냐는 것이다. 어떤 것은 장바구니에서 그냥 놔두기도 하다가 잊히고, 어떤 것은 다른 사람의 선택에 품절이 되곤 하여 기회를 놓친다. '왜 처음의 그 설렘은 잊히고 말았느냐'하는 것은 두고두고 불가사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수집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버려지거나 잊혀가는 것들을 제외한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적당하다. 특히, 나처럼 연민(혹자는 그것을 '측은지심'이라고 한다)이 많은 자는 선정된 것에 대한 애정을 쏟기보다, 혹시라도 나와 인연이 닿지 않아 잊혀가는 것들을 잡아 올리는 낚시꾼이 되어 가는 것이다.
낚시꾼도 매한가지다. 미끼에 걸린 것을 아무거나 잡아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어려도 또는 알을 많이 배어서 그다음을 위해서라도 또는 맛이 없어서, 아니면 값을 못 받아서... 여러 가지 이유로 순간적인 선택의 시간이 이루어진다. 그 선택과 선발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어진 오로지 그 개인의 판단이요, 이때 그의 몸은 '판별기계'이다. 그런 수많은 판단과 판별, 취사선택의 연결의 결과에서 우리는 문득 '철학'이라는 단어를 감히 대어 보곤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인생은 기억할 것이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 기억은 뇌에 남아 있는 직접적 기억도 있겠지만, 그 기억들은 서로 온통 엉키어 너무나 주관적이고 이기적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불변의 기억들이 내 주변에 있다. 그것은 '수집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내가 나중에 변심하여 또는 '방이 좁다'는 이유로 버려지지 않는 한, 그 개개와 연결이 나의 기억을 증명한다.
더 정확한 기억은 오히려 그렇게 더 은유적이고 알듯 말듯하게 중의적으로 존재한다. 그러하니, 오히려 누군가 내 모르게 가져가 버린 음반과 책은 나의 기억을 왜곡한다. 한 번은 외숙모 한 분이 내 음반들을 보다가, '저렇게 음반이 많은데 한 개 주라'고 하였다. 단호하게, '그 음반이 외숙모에게 가면 아무 의미 없는 한 장이지만, 나에게는 전체 음반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하면서 거절하였다. 내가 대학생 때인 것 같은데, 알지도 못하고 뇌까렸던 그 말로 외숙모와 서먹해졌지만, 정확하고 아름다운 말이다.
내 책과 음반, 그리고 나의 종자 컬렉션, 마지막으로 나의 논문과 책이 나의 삶을 설명해 줄까? 그것은 끝없는 나의 선택, 오로지 나만 아는 선택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알까. 다행히도 나의 아내와 아들, 딸은 그런 나의 생각을 아는 것 같다.
삶이 너무 고달파서, 음반을 다 버리겠다고 할 때, 아내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이사를 하면서 심지어 이삿짐센터 직원이 음반과 책이 왜 필요하냐는 말을 할 때, '나는 차라리 쓰지 않는 부엌을 없애고 옷을 사지 않는다'라고 할 때 가족들이 동의해 줘서 고맙다.
우리 집에도 다른 가족들처럼 사진도 상장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저 깊숙한 어딘가에 숨겨져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편, 책과 음반, 그리고 나의 논문과 종자들은 언제든지 드러나 있고 사람들에게 활용되기도 한다. 그것들을 가져가면 나의 기억의 파편을 함께 가져가며,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변용되어 나에게 돌아오곤 한다. '돌아온 탕아'처럼, 그것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올 때, 뜨거운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사람에 대해서도 유독 까다로워졌다. 먼저 나서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어졌다. 대학 때 두루두루 사람을 사귀려고 많이도 만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인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즐겁지 않고, 결혼식 참석과 문상도 굉장히 선별하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만큼은 남들이 나보다도 더 도사처럼 잘 선택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참 초보다.
그런데, 음반과 책, 종자와 저술 등 그 무엇이든 창작물이나 사물을 수집하는 데에는 조물주와 거의 동등한 나의 선택이 작동하지만, 내 영혼이 내 몸 안에 갇혀 있는 한, 사람은 그렇게 될 수가 없음을 잘 안다. 사람에 대한 선택(다른 말로 '버려짐')은 늘 후회하지만, 그것만큼은 잊혀야 하는 것들이다.
결국 삶의 주인공이 되려면, 잘 모으고 버리는 것이다. 아니, 잘 버리고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만끽하는 것이다. 어떤 것(또는 사람)은 잊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