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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중현 Nov 13. 2024

교육과 육종학

식물과 사람을 개발하는 것의 유사점이 있다


아내는 유아교육을 전공했다. 그러다가 결혼했고, 육종학 박사과정을 전공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입장이 되었다. 아이 둘을 키우는 육아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운영하는 학원을 도와주었다. 그것으로 아내의 유치원 교사로서의 꿈, 아니면 좋은 유치원을 설립하여 유아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이 접혔다. 


아내와 연애시절, 돈도 없고 후원자도 없이 어떻게 결혼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많았다. 우리 둘 다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아내는 유아교육으로 유명한 중앙대학교 대학원을 진학하고 싶어 했고, 나는 큰 무리 없이 본교의 대학원 진학을 하고 싶어 했다. 둘 다 공부를 하고 싶어 하지만, 결혼과 육아도 생각해야 했다. 


둘 다 대학원 시험을 보고 먼저 합격하는 사람이 공부를 먼저 하자고 했다. 중앙대 영어 시험은 아주 어려웠던 것 같다. 학점이 좋았으나 아내는 합격하지 못했고, 나는 사실 본교 진학이어서인지 무리 없이 합격했다. 사실, 정당하고 떳떳하지 못한 거래(?)였다. 그러나, 이 생각은 두고두고 남아, 아내는 공부의 꿈을 나중에 이어가서, 방송통신대 농학과, 중앙대학교 식물생명공학 전공 석사를 취득하였다.


오히려 나는 그냥 농학, 그중에서도 유전학과 육종학을 중심으로 식량작물 연구만 꾸준히 한 반면에, 아내는 유아교육학과 농학, 천연물학, 그리고 지금은 약용작물 유전육종까지 연구하는 학자로 성장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서로 많은 대화를 한다. 일반적인 이야기부터 당연히 연구 관련 대화도 많이 한다. 그렇게 대단하고 세련되지 못하다. 대부분 상상력이 지나치게 넘치는 나의 독백과 아내의 진지한 경청, 그리고 조용하지만 강렬한 아내의 피드백. 그것은 국민학교 때 이미 꿈꿨던 부부과학자, 퀴리 부부의 꿈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이제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오늘은 교육과 육종학의 유사점을 많이 이야기했다. 교육은 사람을, 육종은 식물을 다룬다. 그런데 닮은 점이 많다. 


식물 생산을 높이려면, 유묘기의 생존율을 높이고, 생장기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생산성 전략의 두 관점은 많이 달라서, 보통 유묘기를 기르는 과정인 육묘의 과정과 본격적인 생산을 하는 논밭, 그리고 하우스나 시스템에서의 재배를 분리하여 관리한다. 그 과정은 '이앙', 또는 '이식'이라는 기술로 구분된다. 


사람의 교육도 비슷하다. 육묘에 빗대어 보건대, 육아는 '생존교육'을 하는 셈이다. 잘 먹고 자고 싸고, 그러다가 잘 울고 웃는지, 감정 표현을 잘하는지, 잘 걷고 뛰는지, 만약 여유가 된다면 수영이나 운동도 잘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교육인 셈이다. 약간의 글자와 셈을 배우는 순간 유아가 아닌 취학 전 교육이 된다. 어디까지가 '생존'의 영역인지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안될 것이다. 


중등교육의 목표는 어떻게 '사회구성원이 될 것인가' 하는 교육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시민이 되는 방법, 원만한 수준의 소통 방법, 충분한 건강과 소양을 갖는 방법처럼 개인과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육종학 관점에서, 각 요소를 '형질'이라고 한다면, 유아교육 단계는 '필수형질 (must traits)', 초중등교육에서는 '부가형질(value adding traits)'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우리 교육도 육종학을 공부하다가 보면 이렇게 이해되곤 한다. 살아가는 필수적인 것은 다른 것과 구분된다. 부가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것은 더 잘 살기 위한 방도를 찾는 것이고, 뒤의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니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고등교육의 목표는 무엇일까. 육종학에서 다루는 형질의 마지막 것을 '혁신형질(game changer traits)'라고 한다. 산업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경제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개념 전환 수준의 형질을 말한다. 고등교육은 개인의 성취를 뛰어넘어, 사회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 리더를 양성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는 것이다. 


물론, 대학이나 대학원을 진학한 학생들을 교육하다가 보면, 우리와 같이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여러 층의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위 목표 기준에 충실하게 맞추어 설명하면, 어느 친구는 기능인이 될 것이고,  어떤 학생은 기술인이, 다른 학생은 과학자가, 그리고 아주 소수의 학생은 큰 팀리더나 조직운영가, 또는 교육자가 될 것이다. 가장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학생들은 세밀한 세부 항목에 대해서는 앞 단계의 학생들보다 더 못할지라도, 전체적인 안목과 혜안을 가져야 할 것이다. 


공부는 '지극함'에 그 매력이 있다. 지극함은 깊이와 너비에 있다. 깊은 지식은 기술로 추구할 수 있지만, 너비는 이해의 폭에 달려 있다. 이해는 타 분야를 읽어낼 수 있는 일반적인 호기심과 유연성에 달려 있다. 깊고도 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함께 추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모순되지도 않는다. 


아주 맞는 것은 맞는 것이 아니고, 결론이 나는 것은 결론이 아니다. 시작과 끝은 다른 것이고, 정적인 결론은 죽음뿐이다. 


시작과 끝이 일치하는 것은 신의 말이고, 우리 세상은 영원한 것이 없다. 영원은 흐름이고, 그것은 시작과 끝이 다르다는 의미다. 현대 세계가 물질적 번영을 이룬 것은 그 흐름이 실제 한다는 것이고, 그 흐름은 '자본'의 역할이 컸다. 자본은 시작과 끝의 불일치를 자연스럽게 구현하였다. 


대학 이상의 교육은 무엇일까. 세상의 리더가 된다는 꿈을 꿔야 한다. 그것은 강요할 수 있는 것도,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은 온전히 자기의 것이다. 


아내는 '천재를 범재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좋다고 했다. 천재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그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누구나 천재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수준에 다다르는 시간이 다 다르다고 생각했다. 


벼를 길러보면 안다. 많이 심겨 있는 벼 중에는 비교적 약한 벼가 있다. 그런데, 그중에는 나중에 용케도 다른 벼들처럼 수확을 잘 내는 벼가 있다. 어느 수준 이상의 크기만 확보하면, 결국 약간의 시기적 차이를 두고 결국 다 똑같은 수준이 된다. 처음에는 들쭉날쭉하던 농장도 후일 수확할 때 가보면 다 비슷한 이유가 그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중요한 시점에서 학생들을 커트라인대로 평가하는 것은 정작 많은 천재를 포기하는 정책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결국 '다다른 자' 들이 모두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사회가 되었을 때 성숙했다고 할 것이다. 


대학 교육이 대학 입시에 종속된 나머지, 대학에서의 리더 양성에 대한 의지가 많이 꺾였다. 중등교육에서 이루어졌야 할 고민을 대학에 와서야 한다. 난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고등교육이 사라지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기껏 기대해야 할 교육 목표가 기술인 정도에 멈춰있고, 과학자나 리더로서의 희망과 참맛을 경험하지 못하고 졸업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 부부도 그렇다. 꼭 그렇게 살겠다고 하지 않았다. 꿈을 공유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다행히 살아남았다. 난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으니, 아주 행운아다. 나의 중등교육 시절은 눈물겨웠다. 그래서 나는 생존 훈련과 나의 가치 향상 능력이 뒤쳐졌다. 그런데, 아내는 유아교육 전문가였다. 아주 오랫동안 나의 뒤쳐진 부분을 보수해 줬다. 그 시간은 아주 오래 걸렸다. 그래서 지금은 다행히 남들만큼은 살고, 자존감이 많이 회복되었다. 


아내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주변 권고로 유아교육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연애 시절, 아내가 박봉에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외국으로 우리 가족이 모두 떠나는 바로 직전까지 아이 하나하나의 마무리를 모두 책임지는 모습을. 돈으로, 시간으로, 그리고 어느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으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그가 추구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희망은 '살아남는 것'이다. 한 달 만 살아남아주라. 그다음에는 더 좋은 곳으로 옮겨줄게. 아내의 꿈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씨앗을 개발하는 사람이다. 못나고 업신여김을 받는 식물이 쓰임을 갖게 하려는 사람이다. 그것도 '필수적이고 가치적이고 혁신적인' 각 단계에 맞는 식물을 개발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떤 교육을 해야 할까. 나의 꿈은 잘 쓰임을 받는 가치를 스스로 깨닫게 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천재를 창출하고 복제하는 곳, 그것이 훌륭한 품종을 개발하는 육종학자의 꿈과 무엇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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