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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안키친 Apr 17. 2024

학교 밖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

학교의 존재이유에 대한 사유

궁금했다.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더더욱 궁금해졌다.

학교는 과연, 왜 존재하는 걸까?


내가 어릴 적 학교는 학생에게는 당연히 다녀야 하는 대표 교육기관으로 위상이 높았지만, 요즘같이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안타깝게도 그런 유일함이나 대표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학교에서는 학원 숙제를 하고 학원에서는 자기보다 더 높은 학년의 진도를 나가며 선행학습을 한다. 그리고 선행학습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자기 학년의 진도를 나가는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코로나 19의 습격으로 집합금지의 세월이 길어지고 온라인 학습이 일반화되었고, 공교육에 드리워진 학습공백이라는 그림자까지, 전례없는 감염병을 겪으면서 또다시 전통적인 학교의 역할과 미래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최근들어 불거진 교권 침해에 대한 문제까지 더해지다보니 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학부모인 나도 이럴진대, 교육현장에 몸담고 계신분들의 심정은 더 힘들 것 같다.


첫째아이가 2학년 때 처음 학교 내에서 친구와의 갈등을 겪은 적이 있는데, 상대 아이의 부모가 과도하게 반응을 하는바람에 '학교폭력위원회'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학교와 선생님에게 해결방법을 구하려고 했으나 '부모님들끼리 알아서 합의하시고 안되면 학폭위로 가는 것'이라는 가이드를 받았을 때 처음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학교와 선생님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학폭위까지 가지 않는 선에서 우리가 상대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불편한 현실을 알게 됐다.


이후, 간간히 학교 선생님들과 소통하는 자리에 참석하고 학교폭력 문제와 학교의 방침 등을 귀기울여 듣다보니 과거 내가 겪었던 사건에 개입하지 않으려던 선생님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무엇보다 서이초 사건을 계기로 교육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첫째 아이의 경우 학기중이나 여름 방학, 겨울 방학 때 숙제가 많았던 적은 한 학년 정도였던 것 같다. 나머지는 학교 숙제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 것을 보고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반면 일반적인 학원의 경우 갈때마다 숙제를 많이 내주기 때문에 학원숙제에 고달퍼 하는 아이들이 많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엄마 입장에서는 공부는 학원에서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의 존재 이유는 뭘까? 의문은 계속됐다. 첫째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둘째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올해 학기초 학교행사와 선생님 상담을 빠짐없이 참석하며 나의 오랜 의구심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답을 찾았다기 보다는 스스로 작은 결론을 한가지 내리게 됐다.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건, 친구 그리고 낭만이구나'  


학원에서는 오로지 성적만을 보고 옆에 있는 친구가 모두 경쟁상대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과거 학교처럼 성적을 등수로 매겨 경쟁심을 부추기려는 학원이 많다보니 동기부여도 되겠지만 부담이 되는 아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얼마전부터 내가 첫째에게 하던 말을 반성했다.

"너가 그렇게 쉬는 동안 니 경쟁자들은 공부를 한다는 걸알아야해!" 했더니

"와 정말 친구를 경쟁자라고 하다니 엄마 너무하다" 아이가 말했다.

안그래도 스무살부터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아둥바둥 살아야 할 아이에게 10대시절부터

교육한답시고 너무 인색한 말을 한 것 같았다.

학교란 여러가지 공부를 하면서 진로에 대해 고민해보고, 질풍노도의 사춘기 고민을 친구들과

나누기도 하는 낭만이 있는 곳으로 지켜줘야 겠구나.

그래야 30년이 지나도 만나서 추억을 곱씹을 수 있는 '친구'가 남을 수 있겠구나.


학교에서는 공교육 과정에 대한 학습, 그리고 친구들과의 경쟁없는 추억을 만든다. 하루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학교보다는 학원인 경우도 있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무해하다. 친구들을 내가 제치고 앞서야 할 경쟁자로 보지 않고 그저 함께 토닥이며 걸어갈 동료로 볼 수 있다.

지나고보면 사춘기, 학창시절의 낭만으로 내적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낭만을 영원히 이야기 할

'친구'가 남는다. 언제고 만나서 눈치보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 공부 말고도 엉뚱한 장난을 치고 가끔은 객기어린 사고도 친 어린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얼마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너 여옥이 기억나? 우리 고등학교 때 발바닥 때리던 영어선생님, 맨날 안경 올려써서 이마에 걸쳐놓던..."

친구는 담박에 기억한다고 했다. 혹시 지나다 마주치기라도 했냐고 물었다.

"아니, 요즘 내가 노안이 와서 안경을 벗고 휴대폰을 봐야 하는데, 그 옛날 영어쌤 생각이 떠오르더라구 ㅎㅎㅎ"

친구도 허허허 웃었다. 친구들과 선생님 뒷담화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풀었던 시절들, 가끔은 서로의 기억에서 같은 퍼즐이 있어 꺼내 보일 수 있다는 편안함, 안도감이 일상의위로와 힐링이 된다.


평생 친구를 만드는 일,불완전한 10대의 낭만을 쌓을 수 있는 곳, 학교의 존재 이유를 내 나름대로 정의하니 학교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친구와 낭만은 공부나 성적보다도 더 가치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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