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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고기를 먹고 저는 채식주의자입니다

by 현우

* 용어 설명 : 비건은 육류, 생선, 달걀, 우유 등 모든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를 의미하며 논비건은 육식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나는 집에서 밥을 먹거나 친구를 만날 때면 가급적 비건 식단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논비건과 식사를 할 때에는 육수가 첨가된 음식을 먹는 ‘비덩주의(덩어리로 된 동물성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변신한다. 특히 회사 식사 자리에서는 비덩주의자가 된다. 국내 음식점 환경상 비건 메뉴가 있는 음식점은 정말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비건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밝히면 흥미로운 현상이 펼쳐진다. 마치 자연에서 처음 보는 동물을 발견한 것처럼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전혀 불쾌하지 않다. 비건 문화를 향한 관심이니까.


아내 분도 비건이신가요?


채식하기 전이었다면 나라도 궁금했을 것 같은 질문들이 쏟아진다. 대체로 비건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채식의 종류(단계)를 먼저 묻는다. 육류를 포함해 우유와 달걀도 먹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단하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육류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먹지 않는 동물성 음식이 많아질수록 더욱 어려운 단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기 없이 밥을 못 먹었던 육식파 과거를 떠올리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이런 질문에만 대답하더라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어쩌다 내가 결혼한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화들짝 놀란다.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에 놀란 건지, 비건이 결혼했다는 사실에 놀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질문이 이어진다.


"아내 분도 비건이신가요?"


한 문장으로 대답하기엔 참 곤란한 질문이다. 일단 비건은 아니라고 답한다. 배우자는 본인 스스로를 비건 지향인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배우자는 내가 채식이라는 세계의 문을 열 때 함께 문고리를 열어준 이다.


비건 지향인 남편과 고기 먹는 아내가 함께 삽니다


채식을 하기 전부터 나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입으로는 동물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찝찝함을 느꼈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동물이 어떻게 고기가 되는지 영상과 책을 뒤지면서 동물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삼십여 년 동안 먹어온 식단을 단번에 바꾸는 건 어려웠다. 처음엔 물살이(생선)와 우유, 달걀은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시작해 보기로 결심했다. 데이트 때마다 먼저 고깃집이나 치킨집을 가자고 제안했던 사람이 결혼 후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하겠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배우자는 이야기를 경청해 줬고 결심을 지지해 주고 응원해 줬다.


비건을 지향하는 이유는 비인간동물의 고통 때문이다. 전적으로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하는 인간의 폭력성이 낳는 고통이며 이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배우자는 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공감한다. 나와 함께 비건 식단을 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한다.


IMG_1995.JPG 배우자가 만든 가지솥밥


우리 부부는 때론 함께, 때론 따로 식사한다. 평일에는 퇴근 시간이 맞지 않기도 하고 배우자가 저녁 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 식사한다. 주로 집에서 조리한 현미잡곡밥과 비건 국, 반찬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한다. 주말에 배우자는 아침보다 더 맛난 잠을 자고 나는 주말 시간이 아까워서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보통 혼자서 비건 빵이나 비스킷, 과일, 두유, 커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한다.


이쯤이면 우리 부부 사이를 의심하는 이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주말 점심이나 저녁 끼니는 함께 한다. 외식할 때는 비건 전문 음식점에서 식사한다. 서울에 비건 전문 음식점이 많이 생겼다고 하지만, 어딜 선택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수는 아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비건 중식점, 비건 태국음식점, 비건 양식점 등 가는 곳이 얼추 정해져 있다. 이중에는 나보다 논비건 배우자가 더 좋아하는 비건 전문 음식점도 있다.


때로는 비건 음식점은 아니지만 비덩주의 음식을 먹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동물성 육수가 들어간 칼국수나 두부요리, 샤부샤부를 먹기도 한다.


논비건 아내가 차려주는 겉절이, 비건 지향인 남편이 만드는 제철나물


집에서 식사할 때는 한두 가지 비건 요리를 해서 간단하게 차려먹는다. 비건이라고 하면 건강한 음식만 챙겨 먹을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자연식물식이나 여러 채소를 활용한 아름답고 보기 좋은 비건 요리가 많다. 하지만 나는 게으른 비건이다. 요즘은 감사하게도 대기업에서 나온 비건 가공식품이 많다. 우리 집 냉동실에는 비건 두부텐더, 김말이, 비건만두, 비건콩치킨 등 이른바 '정크 비건 푸드'가 오분대기조로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즐겨 먹는 비건 요리는 논비건 배우자가 요리해 주는 비건 두부조림이다. 두부 한모와 양파를 잘 썰어 넣고 간장, 고춧가루, 설탕 등으로 만든 양념으로 조리한다. 단맛과 짠맛이 조화를 이룬 얼큰한 비건 두부조림은 그야말로 밥도둑이다. 밥 한 공기를 뚝딱할 수 있다. 일부러 두부조림 조리법은 배우지 않고 시도하지 않고 있다. 배우자의 비건 두부조림을 먹으며 애정을 느끼고 싶은 욕심 때문인가 보다.


IMG_3128.JPG 배우자가 만든 비건 배추 겉절이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 집은 최근 들어 주말마다 겉절이 공장이 된다. 배우자가 나를 위해 비건 반찬을 만들겠다며 알배추를 사 와 매콤한 비건 배추 겉절이를 담는다. 1~2주 정도는 충분히 먹는다. 비건 참치액을 사서 담겠다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지금 겉절이 맛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매일 배우자가 차려주는 비건 밥상의 호사만 누리는 건 아니다. 필자는 논비건 배우자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나물무침 전문가다. 집 근처 생협에 들러 제철나물이 보일 때마다 구매해서 반찬을 해두는 편이다. 매번 배우자가 나물무침을 먹을 때마다 나를 나물무침 전문가라고 부른다. 마트나 생협에 들를 때마다 제철나물을 유심히 보게 되는 이유 아닐까. 칭찬은 배우자를 춤추게 한다.


나물무침의 요리 비법은 '참기름'에 있다. 참기름 한 방이면 죽은 나물무침도 살려낸다. 한 가지 더 팁을 공유하자면 삶는 시간도 중요하다. 아삭한 식감을 살리고 싶으면 삶는 시간을 줄이고 부드러운 나물을 먹고 싶다면 좀 더 오랜 시간 삶으면 된다. 몇 번 시도하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식감의 정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끔은 배달 음식을 먹기도 한다. 근처에 배달이 되는 비건 옵션 마라탕 음식점이 있다니, 이건 행운이다. 저녁 시간에는 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맛집이다. 최근 이 식당에는 매콤한 버섯튀김 신메뉴가 생겼는데 맥주 안주로 딱이다.


배우자가 고기를 먹고 싶어 할 때 어떡하냐고? 논비건이 비건에 맞춰주는 거 아니냐고? 배우자를 모르는 이들이 배우자를 나서서 변호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은 배려심 없는 이기적인 비건에게 옐로카드를 주려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스스로를 변호하자면 지난 주말만 하더라도 비건 마라샹궈를 주문하면서 논비건 꿔바로우를 주문했다. 비건 마라샹궈와 버섯튀김은 함께 먹고 꿔바로우는 배우자 혼자서 먹었다. 우리는 이렇게 먹고 산다.


IMG_3127.JPG 비건과 논비건 부부의 밥상


비건과 논비건의 부부생활의 파국을 기대했는가. 고기를 못 먹게 하는 비건 남편의 등쌀에 밥상을 엎어버리는 논비건 아내를 상상했는가. 혹시 그런 이가 있다면 실망시켜 드려 죄송하다. 깨가 쏟아지는 부부 정도는 아닐지라도,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때론 공유하면서 먹고살고 있다.


논비건이 비건을 사랑하고 비건이 논비건을 사랑하는 방식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비건 지향인인 나와 논비건인 배우자가 한 집에서 공존할 수 있는 건, 훌륭한 성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공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독특한 우리 부부 분위기 때문 아닐까?


우리는 딩크족을 지향한다. 결혼한 지 7년이 지났지만 아이가 없고 아직 계획도 없다. 서로 개인 시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이유다. 나는 친구들과 주말에 산을 가기도 하고 복싱 경기를 관람하거나 복싱 원정 스파링을 가기도 한다. 배우자도 친구를 만나 식사를 하거나 집에서 뒹굴뒹굴 쉬기도 한다.


주말에 집에서 같이 쉬더라도 한 명은 거실에서, 한 명은 안방에서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부부 맞아?' 이런 생각이 들 때쯤 같이 성북천을 걷기도 하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함께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논비건과 비건이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방식에 특별한 비법은 없다. 비건과 논비건이 공존에 필요한 건 존중과 유연함이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좋은 것이 있다면 강요하지 말고 공유해보자. 하지만 가끔 시답잖은 일로 되풀이하는 부부싸움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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